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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백성을 위로하라

 

(40: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40: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코로나여파가 6개월이상 지속되고 있습니다. 10월에는 백신이 나온다 하더니 3차임상에서 문제가 생겨서 백신이 언제 나올지 모른다는 뉴스입니다. 아직 일도 못하는 분들도 계시고 가게를 열고 일은 하지만 수입이 반에 반토막이 난 분들도 있습니다. 만일 이러한 상태가 6개월만 계속되면 한국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도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교인들은 마음껏 찬양도 못하고 늘 긴장하며 불편하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목장으로 모여서 밥도 먹고 살아가는 이야기들도 나누어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음은 답답한데 나누고 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들려오는 전염과 죽음의 소식에 지구촌이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가난한 나라와 잘 사는 나라를 불문하고 사람들은 고통 중에 부르짖고 있습니다. 무슨 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성경에서 그 답을 찾아보았으면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40: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 하나님이셔서 그들의 범죄로 그들을 심팜하실 수 밖에 없지만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이 낙심하지 않도록 하기위하여 웃시야왕이 죽던해(BC740) 그들이 포로로 잡혀가기 150년전부터 (BC587) 포로70년후에 나타날 회복을 미리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6장에 가보시면 제자들이 전도사역을 다녀와서 지치고 배고픈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과 잠시 쉬기 위해서 배를 타고 바다건너편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를 알고 그곳으로 달려갔고, 심지어 예수님보다 더 앞서 그곳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6:34)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6:35)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날도 저물어가니

(6:36)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6:37)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날이 어두워져가자 제자들은 무리들을 보내어 음식을 사먹게 하라고 제안했읍니다만 예수님은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52어로서 5천명을 먹이는 기적을 행하셔서 배불리 먹여 주시며 그들을 위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모인 사람들은 병들고 아픈 사람들이었고, 돈 없고 배고프고 굶주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었고, 전혀 귀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사람들을 사랑하셨고, 소중하게 대해주셨습니다.

 

(3: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의지하고 우리를 긍휼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셔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바벨론에서 고생할 이스라엘무리를 내 백성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고통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하실 때 먼저 내 백성이라고 부르십니다.

(40: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또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너의 하나님이라 말씀하십니다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서 바로의 학대 아래 부르짖는 히브리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모세를 보내셨을때도 하나님께서는 내 백성을 보내라’(7:16, 8:1)라고 하라고 하였습니다. 바로가 붙잡아 놓고 종으로 부리며 학대하던 이스라엘은 바로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복 주시려고 준비해 놓으신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내 백성이라는 말 속에 그들을 아끼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바로의 손에서 자기 백성을 건져내셨던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어 범죄하여 징벌을 받아 고통 중에 우는 이스라엘을 내 백성이라 부르십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43:1)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43:4) 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의 본심을 깨닫지 못하고 원망합니다.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나의 원통한 부르짖음을 하나님이 무시하신다’(40:27) 하였고,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셨고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49:14) 하였습니다. 이런 백성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49:15).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우리에게 제일 위로가 되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구속을 받아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제 저와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피 값으로 구속함을 받아 세상과 사탄의 그 어떤 권세도 빼내갈 수 없는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에서 위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이스라엘백성들이 고통당하는 것은 그들을 정결케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 부모님을 따라 양파를 키워본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양파는 추수할때가 되면 밭에 심겨진 양파들은 죄다 쓰러져 있습니다. 바람이나 장대비에 쓰러졌거나 누군가 일부러 쓰러뜨려 놓은 것이 아니라 그냥 자빠진 것들입니다. 꽂꽂하게 서있던 양파대가 그렇게 쓰러져야 양파 알뿌리가 굵어집니다. 자연의 법칙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그리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양파라고 해서 다 쓰러지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꼿꼿이 서있는 양파도 있읍니다. 양파 쫑이 올라온 것들인데 수놈이라 불리는 것들은 쓰러지지 않고 꼿꼿이 서있기 때문에 알뿌리가 굵어지지 않아 상품가치가 없습니다. 이렇게 밭에 쓰러진 양파에도 소중한 진리가 담겨있습니다. 알뿌리가 굵어지기 위해 땅위의 줄기가 넘어져야 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 쓰러져라’, ‘자신을 부인하라’, ‘너 낮아져라요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넘어지고 쓰러짐에 어찌 아픔과 눈물과 탄식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쓰러짐은 넘어뜨림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진짜 일으켜 세워주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며 우리를 살리고자 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한 목적을 두시고 쓰러지라 할 때 쓰러지는 아픔을 통과해야 상품가치가 있는 알뿌리가 열립니다.

 

40: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정답게)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고통)의 때가 끝났고 (징계를 받고 회개함으로)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징계)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언젠가 반드시 그 바벨론의 속박에서 풀어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그냥 풀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기간 동안 철저히 그들을 징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철저히 회개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그들의 죄를 사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는 충분한 고통을 받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실 때는 우리는 겸허히 그 징계를 받아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 그 기간 동안 우리를 철저히 회개를 시키셔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 고통의 시간들이 빨리 지나가게 해달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 이 기간을 철저히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우상시하지는 않았었는지?---또 우리의 신앙생활이 형식적이고 외식적이지는 않았었는지?---또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던 것들은 없었는지?

---모든 일이 내힘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던 교만은 없었는지? 우리가 반성하고 돌이키고나면 하나님께서 이 고통이 끝이 나게 하시고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40: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의 고통의 시간 가운데에서 회개하고 반성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악을 사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고통의 시간들이 그들에게 더욱더 정결함을 가져다 주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 우리는 고통의 시간들을 잘 견딜 수 있을 것입니다.

고통에는 끝이 있습니다. 밤이 길면 새벽이 오듯이 광명의 날이 밝아 올 것입니다. 사람이 감당치 못할 시험은 허락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넷째로 고난받음으로 고난당하는 자를 위로할 수 있는 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게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후 1: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우리는 살면서 상처를 입습니다. 살아가는 시간과 비례적으로 상처는 누적됩니다. 이 세상에 상처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처럼 고통을 당하시고 인생의 아픔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는 제자들의 배신과 백성들의 거부라는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처참한 고통 속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며 단절과 고독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상처를 아시기에 우리의 치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상처 입은 치유자'인 것처럼 우리들도 우리 자신이 입은 상처로 인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 역시 '상처 받은 사람'이었읍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오랫동안 유대인들로부터 극심한 모멸과 차별 그리고 폭력을 경험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남유다의 백성인 유대인들은 같은 야곱의 후손인 사마리아인들을 지독히 멸시하고 차별하고 학대했습니다.

그들로부터 상처를 받았고 아픔을 겪어보았기에 강도 만난 죽어가는 사람을 보았을때에 그는 그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줄 수가 있었습니다. 이 선한 사마리아인이야말로 '상처 입은 치유자'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상처를 받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 몸이 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상처를 통하여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할 수 있다면 우리는 오히려 상처받는 사람들을 돕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미 받은 상처에서 도망치지 말고 그것에 대해 용기를 내서 터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아픔의 이야기를 말하고 다른사람의 아픔을 들어주고 지지하고 격려하는 삶도 필요합니다.

가만히 보면 상처를 '' 사람은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잊어버립니다. 하지만 상처를 '받은' 사람은 그 경험을 자꾸 되새김질합니다. 내가 왜 상처를 받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합니다. 아프기 때문입니다.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희망은 언제나 '상처 받은 사람들' 쪽에 있습니다. 상처 입은 사람들이 그 상처를 딛고 치유자가 될 때에는 세상은 그들을 통해서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미국의 한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눈 색깔로 우월하고 열등한 사람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갈색 눈이 우월하고 파란 눈이 열등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아이들은 눈 색깔에 따라 주눅이 들기도 하고 차별을 하기도 했습니다.

얼마 후 이번에는 그 반대로 가르쳤습니다. 상황은 금세 역전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사실은 피해자의 경험을 해본 아이들은 '우월한' 집단이 되어서도 '열등한' 집단에게 너그럽더라는 것입니다. 차별을 받는 소수자가 되어본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에 더욱 조심할 줄 알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시편 147:3, 이사야 30:26)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상처로부터 새 살이 돋아나게 하여 고쳐 주"시는 분입니다(예레미야 30:17). 하나님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고린도후서 1:3-4).

 

아무쪼록 이 코로나 19라는 고난의 시간에 하나님을 의지하셔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고통이 심해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백성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정결케하시는 분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아가 상처받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분들로 성숙해 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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