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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과 위로의 주님 (7:11-17)

 

 

<본문설명>

 

본문을 통해 우리는 장례행렬을 따라가며 울고 있는 한 여인을 보게 됩니다. 그녀는 나인이라는 동네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갈릴리 바닷가 가버나움에서 남쪽으로 하룻길쯤 걸어가면 나오는 아름다운 골짜기 동네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느닷없이 남편이 세상을 떠났고 그녀는 하루 아침에 과부가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여자가 홀로 되었다는 것은 앞날에 엄청난 시련과 극심한 가난, 고독이 기다리고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며 하루하루를 보냈을까요? 그래도 자라고 있는 어린 아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정성을 다해 고생을 이겨가며 아들을 키웠습니다.

그런데 어떤 연유이지는 모르지만 그 외아들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마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싶어도 더 흘릴 눈물이 없을 만큼 울었을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녀의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 여인의 집에 모여들었습니다. 다들 남편을 먼저 보내더니, 이제는 하나 밖에 없는 아들마저 보내다니 쯧쯧하며하며 안됐게 생각하며 장례 준비를 거들었을 것입니다.

하룻밤을 더 보내지 않고 오후 5시나 6시쯤 되면 죽은 자를 메고 나갑니다.

장례 행렬 앞쪽에는 여자들을 세웁니다. 그리고 남자들이 관을 메고 따라갑니다. 그 뒤에는 돈을 주고 불러온 호곡꾼이 피리를 불고 곡을 하면서 뒤를 잇습니다.

장지라고 해봐야 동네에서 한 20~30분이면 도달할 수 있는 곳에 있습니다. 이제 장례행렬이 동네를 떠나 성문으로 빠져나갑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많은 무리를 이끄시고 나인성을 향해 걸어오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성 가까이 이르렀을 때 마침 장례 행렬이 성문을 빠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 많은 군중을 데리고 나인성을 향해서 오고 계십니다. 그런데 성문 입구에 이르렀을 때 반대 편에서 다가오는 죽음의 행렬과 만난 것입니다. 생명과 죽음의 만남입니다.

 

먼저 주님은 관 뒤에 따라오면서 슬피 울고 있는 과부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습니다. “과부를 보셨다고 말씀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주님은 그 과부를 주목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항상 먼저 보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슬픔을 당하는 자들.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는 자들. 버림받은 자들, 실패한 자들, 병든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보셨다는 말이 40여 번 나옵니다. 주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라는 말씀도 그 중 하나입니다.(9:36)

이처럼 주님은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 하는 사람들에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마음은 항상 사랑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과부를 보고 울지 말라고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슬픔 당하는 사람을 볼 때, 위로한다며 울지마, 울지마 하고 말하지만 대부분 빈말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빈말로 울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관에 손을 대시자 운구하던 자들이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이어서 주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그러자 그 청년이 일어나 앉았고 말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을 과부에게 인도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녀의 눈물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셨고,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실제적으로 그 과부를 위로하셨습니다.

 

이 본문의 이야기는 참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이 본문의 말씀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 것일까요?

 

첫째로 그것은 주님은 생명의 주님이시다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온 세상 앞에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음을 이기신 생명의 주인이시요,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온 세상을 향해서 나는 죽음을 이기었노라”. “나는 생명의 주가 되느니라하는 것을 선언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청년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일어나라 할 때 죽었던 자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로마서 149절에서 예수님은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계시록 118절에서 예수님은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125, 26절에서 주님은 친히 선언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그러므로 사실 예수 믿는 자에게는 죽음이란 없습니다. 육신의 죽음은 영원히 사는 생명으로 옮기는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가사에 나오듯이 죽음은 단순히 요단강을 건너가는 과정입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이미 떠났습니다.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죽음을 정복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20:38) 하셨습니다.

아브라함, 이삭도, 야곱도 살아 있읍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 안에서 영원히 삽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사랑하는 남편을 먼저 하나님 앞에 보낸 분이 있습니까? 어린 자녀를 먼저 하나님 앞에 보낸 분이 있습니까? 우리는 인간이기에 슬퍼할 수 밖에 없지만 먼저 간 그들이 결코 죽은 자가 아님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죽은 자를 죽었다고 하시지 않고 잔다고 말씀하셨습 니다. 사실은 죽은 자가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에 쌓여서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 자를 놓고 죽었다고 하면 안됩니다. 우리도 언젠가 그곳으로 갈 것입니다.

둘째로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은 주님은 우리가 울고 있을 때 우리를 주목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한번도 눈물 흘리지 않고 세상을 사시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세상에 계실 동안 몇 번 우셨습니다. 눈물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을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눈물은 통역도, 설명도 필요 없는 그 자체로 완벽한 언어가 됩니다.

 

우리 인생을 고통의 바다라고 말합니다. 인생은 마치 고통과 슬픔이 기다리는 먼 항해 길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어찌 눈물이 없겠습니까?

우리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울고 태어납니다. 그리고 죽을 때 보면 눈에 눈물이 고인 채 숨을 거두는 것을 봅니다. 태어날 때 울고, 죽을 때까지 우는 것이 인생일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물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 문화의 밑바닥에는 우는 것을 천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슬픔을 무조건 억누르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울고 싶을 때는 마음껏 울어야 합니다. 울고나면 오히려 시원하지 않습니까?

슬퍼도 슬프지 않는 것처럼 처신하고 힘들어도 힘들지 않은 것처럼 처신하는 것이 위선입니다. 정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울고 싶을 때는 울어야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우는 것은 인생 본연의 모습입니다. 이 세상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면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처참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나는 평안하고 어려움이 없는 형통한 인생을 산다 할지라도 내가 조금만 눈 높이를 낮추어 주변을 살펴보면, 눈물 없인 쳐다볼 수 없는 참혹한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과거 제가 어렸을 때에는 교회를 가면 기도시간에 우시는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기도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울음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통성기도가 아닌 통곡 그 자체였습니다.

60-70년대 시대는 교회란 우는 장소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은 바로 울기 위해서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슬픔과 한을 풀어 놓을 데가 없어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울고, 찬송하면서 울고, 기도하면서 울고, 서로 붙들고 울고, 그러면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위로의 손길을 체험했습니다. 그 힘을 가지고 세상을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눈물을 귀히 여기십니다. 주님이 울고있던 과부를 보시고 울지말라고 말씀하셨듯이 주님은 우는 자를 주목하십니다. 우리 가운데서 남모르게 우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울고 있을 때 주님이 여러분을 주목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고, 눈물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신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성도의 눈물을 귀히 보십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히스기야는 자신이 죽을 병에 걸려서 다시 살 수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벽을 향해 대성통곡 하면서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38:5)

하나님이 우리의 눈물을 보십니다. 그래서 히스기야에게는 15년을 더 살 수 있도록 생명을 연장시켜주셨습니다. 눈물이란 이렇게 능력이 있습니다. 눈물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과 보좌를 움직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어야 됩니다.

 

세 번째 이 시건이 주는 교훈은 주님은 우리를 위로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이길때까지 하십니다. (12:20) 내가 네 눈물을 씻겨주겠다 라고 내가 너를 위로해주겠다.라고 속삭여주십니다.

 

그러면 주님이 어떤 방법으로 우리 눈의 눈물을 씻겨 주실까요?

물론 히브리서 416절에 나온 말씀처럼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가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려울 때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은 내가 필요할 때마다 도울 수 있는 은혜를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로 주님 앞에 나아가면, 항상 필요를 따라 우리를 위로해주시는 주님의 손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때로는 우리가 어떤 어려운 인생의 풍랑을 만나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될 때에 1, 2, 3년이 지나가도 그 문제가 해결이 되지를 않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것 같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계신가 하는 의심에 시달릴 때도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 우리가 믿어야 할 사실을 바울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로마서 8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십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우리 당대에서는 그 그림을 보지 못하고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크고 선하신 큰 뜻을 갖고 우리를 다루고 계신다는 것을 믿으면, 우리 는 눈물을 훔치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룻기에 나오는 나오미 라는 여성은 희락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 좋은 이름 이긴 하지만 그녀의 팔자가 너무나 기구했읍니다. 그 땅에 흉년이 들자 남편과 함께 아들 둘을 데리고 모압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10년 사이에 남편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큰 아들이 죽었고, 오랜 후에 둘째 아들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룻기를 읽어 보았듯이 나중에 그 자부 룻이 재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 오벳이 다윗 왕의 할아버지가 됩니다.

그리고 그 혈통을 따라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그리시는 큰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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