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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마태복음 25: 31-46 / 제목: 구원 받은 자의 삶

2주 전이 부활주일이었죠? 그 날 우리 모두는 부활 주일을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기뻐하며 감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과거 어느 해보다도 더 기쁘고 감사한 부활 주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 그 자체로도 감사와 기쁨이 넘쳤지만, 부활주일 그 다음 날이 바로 제가 유럽 파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었기 때문에, 하룻밤만 자면 집에 돌아간다는 그 기쁨으로 이번 부활주일을 더욱 감사하게 보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며 감사하는 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그러나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완성하시기 위해 이 땅에 다시 오실 예수님, 그 때와 시는 언제일지 아무도 모르지만 다시 오실 그 주님을 기다리며 그 때를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함께 나눌 말씀의 본문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데요, 성경을 가지고 계시면, 함께 찾아보실까요? 마태복음 2531절에서 46절까지의 말씀입니다. 한 절씩 교독하시겠습니다.

(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25: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25: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25: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25: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25: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25: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25: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25: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25: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25: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25: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말씀을 시작하면서 먼저 시 한 편을 함께 읽겠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하기 보다는 이해하며,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해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아멘.

지금 읽은 이 시는 성 프란시스의 '평화의 기도'라는 시입니다. 너무 아름답고 은혜로운 시이며, 우리의 삶이 매일 이 시와 같이 살게 되면 정말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런데 이 시 안에서 조금 만족스럽지 못한 표현 하나가 발견됩니다. 바로 맨 마지막 줄, 영생을 얻게 된다는 표현인데요, 이 시의 저자의 의도도 정말 그러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치 우리가 평화의 도구로 살다 보면 결국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은혜로만 얻을 수 있는 영생의 길이 인간의 선행으로 가능한 것처럼 그 의미가 바뀌어진다면 상당히 심각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혹시 원어의 의미는 그렇지 않은데 한국말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되었다면 참 다행이다 싶지만, 어쨌든 저는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이 이렇게 바뀌면 참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주고, 용서하고 자기를 버리며 그렇게 남을 위해 평화의 도구로 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영생을 얻은 자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영생이 있기 때문에,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 받은 자이기 때문에 평화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말과, 반대로 우리가 평화의 도구로 살았기 때문에 영생을 얻게 된다는 말은 완전히 다른 의미입니다. 너무 좋은 시이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면 꼭 그렇게 살면 좋겠다 싶은 시이지만, 만일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만은 부족하며 오늘 이 시처럼 평화의 도구로써 선행이 있는 삶이 있을 때 영생을 얻게 된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믿고 알아왔던 복음의 핵심과는 괴리감이 느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의 비유 또한 이 시의 맨 마지막 부분과 비슷한 부분이 발견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은 인간의 어떤 노력과 행위로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에 의해서 은혜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오늘 본문 또한 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양과 염소의 비유는 언뜻 보면 영생과 영벌을 얻는 조건이 마치 35절과 36절에 언급된 여섯 가지 선행을 해야만 얻어지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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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비유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천사들과 함께 오실 때에, 하늘 영광 보좌에 앉아서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을 모으고 두 그룹으로 나누어 한 그룹은 오른쪽에 세우고 다른 한 그룹은 왼쪽에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두 그룹으로 나누는 기준은 35절과 36절의 여섯 가지 선행을 했는지의 여부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저도 예전에 학교 다닐 때 이런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고등학교 1학년을 다닐 때였는데,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이 종례 시간에 말씀하시기를, “, 이제부터 내가 이름 부르는 사람은 앞으로 나와라그러십니다. 선생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이름 부르기를 마쳤을 때, 교실에는 이름이 불려져서 앞으로 나가 있는 사람과 이름이 불려지지 않아서 앉아 있는 사람, 이렇게 두 그룹으로 나뉘어졌습니다. 학생들은 초초해하면서 도대체 앉아 있는 사람은 왜 앉아 있는 것이며 앞으로 불려 나간 사람은 왜 나가 있는 것일까 하며, 불안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후 선생님은 두꺼운 야구 방망이 하나를 꺼내 들고서 말씀하시기를, “앞에 나와 있는 너희들은 이번 달 모의고사 성적이 지난 달보다 떨어졌기 때문에 매를 맞아야 한다. , 한 놈씩 엎드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앉아 있는 학생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앞에 나가 있는 학생들은 울상이 되었던 그 때의 일이 기억납니다.

이렇게 한번 가정을 해 보실까요? 오늘 본문처럼 저와 여러분이 마지막 날에 주님 앞에 갔을 때, 주님께서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을 가리기 위해 한 줄로 쭉 세워 놓고, “, 너는 천국, 너는 지옥, 너는 천국, 너는 지옥이런 식으로 그룹이 나뉘어 지는 상황 속에 우리가 줄을 서 있다면, 얼마나 긴장되고 초초하겠습니까? 시험 성적이 떨어져서 매를 맞느냐 안 맞느냐의 경우와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 라인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지금 천국행 라인에 서 있는 이유는, 내가 배고플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와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물어봅니다. “저희들은 주님께 그렇게 해 드린 적이 없는데요?”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그런데 나름대로 자신은 예수 믿는다고 고백했고, 교회도 잘 다녔다고 생각했던 어떤 사람이 지옥행 라인으로 분류되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주님께 묻습니다. “주님, 저는 너무 억울합니다. 저는 주님이 배고픈 것과, 목마른 것과, 나그네 된 것과, 벗은 것과, 병든 것과 감옥에 갇힌 것을 본 적이 없는데,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주님의 대답은 전과 같습니다.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았다면 곧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다.”그래서 결국 예수를 믿었다고 하는 그 사람이 이 여섯 가지 선행을 베풀지 않아서 지옥행 라인에 서게 되었다면, 너무나 억울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은 뭔가 잘못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님, 이건 제가 지금껏 알고 믿었던 것과 다르지 않습니까?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고 해서 예수 잘 믿었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완전히 망했습니다. 자꾸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고 하는 말, 어쩐지 좀 너무 쉽다 생각했는데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럼 그렇지. 선행을 하지 않고 어떻게 천국에 들어간단 말입니까? 예수를 구세주로 고백만 하면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고 했을 때 진작 알아봤어야 했는데, 순진하게 그 말만 믿고 신앙생활 하다가 완전히 속았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말 그런가요? 믿는다고 고백만 했기 때문에, 그래서 이 여섯 가지 선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천국을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면 오늘 이 본문을 읽는 우리의 마음은 상당히 불편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주님께서 오늘 이 비유를 통해 그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뿐만 아니라 오늘날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저와 여러분에게도 분명히 주시고자 하는 경고의 메시지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비유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본문의 양과 염소의 비유는 인간이 어떻게 해야 구원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과는 상충되는 듯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구원 받기 위해서는 오늘 이 여섯 가지 선행을 반드시 다 해야만 합니까? 만일 그 중에 하나라도 빠졌다면 구원 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가난하고 소외된 약한 자들을 돕고 섬기는 일이 참 중요한 것임은 분명한데, 그러면 그것도 정도가 있을텐데, 몇 번을 해야 한단 말입니까? 한 달에 한번, 일년에 한번, 도대체 몇 번을 해야 영생을 얻는다는 말입니까? 오늘 본문이 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해 말씀하는 것이라면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이 있어야 하는데 여섯 가지 선행만 가지고 영생의 조건을 설명하기는 뭔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바로 앞의 24장에서는 이 세상의 마지막 때에 일어날 환란과 징조에 대해서, 또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말씀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5장 앞 부분에는 열 처녀의 비유와 달란트 비유를 통해 성도가 종말의 때, 마지막 때를 어떻게 준비하며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오늘 이 비유의 말씀을 성경의 전체적인 문맥을 통해 살펴보면, 이 비유는 인간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는지, 그 구원 받는 방법에 대한 말씀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마지막 때를 사는 성도들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경고의 말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늘 깨어 있어서 주님 오심을 기다리라는 말씀으로 받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으며 생각하는 것은, “그래, 이 말씀은 그저 비유일 뿐이야. 역시 구원은 믿음으로, 은혜로만 얻는 거야. 오히려 이 말씀은 우리의 순수한 신앙에 혼동을 줄 수 있다라는 이유로 오늘 이 본문을 적당히 넘겨 버리고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그러한 생각이 오늘날 이 시대의 기독교의 이미지를 다 망가뜨려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웠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영생을 얻는 데에 오직 믿음이면 충분한데 왜 자꾸 이런 여섯 가지 선행들을 말하는 거야" 라고 말하면서, 가능하면 이 말씀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으려 했고, 가능하면 눈을 두려 하지 않으려 했고, 가능하면 무시하며 살려고 했던 우리의 변질된 신앙의 모습이 오늘날 기독교가 전하는 복음의 의미를 훼손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천국은 은혜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확실히 믿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이 양과 염소의 비유도 구원의 방법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삶을 한번 돌아보며, 그 동안 오늘 이 말씀이 그렇게 우리의 삶 가운데 무시되고 잊혀져 왔다면 이것 또한 뭔가 아주 많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쉽게 빠질 수 있는 잘못, 바로 삶 가운데 나타나는 행함과 열매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그저 예수 믿는다고 고백하고 인정하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고 생각하는 값싼 복음, 변질된 복음에 대해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직 믿음으로 받게 되는 구원, 그 믿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 믿는 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저 입술로 고백하고 인정하기만 하면 그게 다라고 생각하는 신앙의 모습이 우리 주변에 팽배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단순한 지식적인 동의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굳이 부정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말하는 것에 별로 거부감이 없으니까, 그래도 안 믿는 것 보다는 믿는 것이 마치 공짜 보험에 가입이라도 한 것처럼 마음이 편안하니까, 어차피 믿는 다고 말해도 손해 볼 것 없으니까." 이러한 이유들로 그저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것, 이것은 믿음이라기 보다는 지식적 동의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저는 군대에서 병사들을 섬기는 대대 군목입니다. 저희 대대에는 약 600명의 군인들이 있는데, 종교 분포도를 보면 전체 인원의 70%가 크리스천 입니다. 놀랍죠?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자신이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는 그 70%의 절반 이상이 교회를 나가지도 않고, 예배를 드리거나 말씀을 묵상하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크리스천이라고 말합니다. 이 믿음은 너무 쉬운 것입니다. 자신의 삶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고, 또한 달라지고 싶지도 않은데, 그냥 믿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말해도 자기 인생의 주인이 바뀌거나 인생의 목적이 절대 바뀌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말하면서, 어차피 나 하고 싶은 것, 누리고 싶은 것, 내 인생의 쾌락과 성공을 위해 어떤 일이든지 다 하면서도 손해 볼 것 없다면, 예수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별로 어려운 일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예수를 믿어도 그 인생관이 하나도 바뀌지 않고, 삶에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바로 십자가의 은혜, 생명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그 큰 은혜를 결코 느끼지도, 깨닫지도 못하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참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 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12-13)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세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우리의 본질이 바뀌고 우리의 소속이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가치관이 달라지고 삶의 목적과 방향이 달라진 것을 의미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를 회개하고 은혜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내가, 영원한 지옥 불구덩이에서 죽지도 못하고 고통 받아야 하는 내가 아무 공로도 없이, 나의 그 어떤 노력과 행위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그 은혜의 감격 때문입니다. 그렇게 은혜를 받은 자의 삶 속에는 가난한 자들에 대해서, 헐벗고 굶주린 자들에 대해서, 소외되고 무시당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관심이 있게 되고 섬김의 삶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은혜를 받았는데도 그 삶 속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 믿음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전에 지역 교회에서 청년부 사역을 할 때, 청년들이 가끔 저에게 묻습니다. “목사님, 신앙생활 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신앙생활이 힘드십니까?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힘드십니까? 혹시 이 자리에 그런 분들이 계시다면, 왜 신앙생활이 힘든지 제가 알려드릴까요? (고후 5:17) 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그리스도 밖에 있던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게 되면,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타던 차가 고장났을 때 부품 몇 개를 바꿔서 차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고장난 차는 완전히 폐차 시키고 새 차를 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리스도 밖에 살던 때와 비교해서 별로 달라진 것도 없고, 인생의 가치관과 목적과 방향이 180도 수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살려고 하니까 어떻게 힘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힘들 수 밖에 없습니다.

저희들은 지난 4월 한 달 동안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사순절 기간을 보내고, 또한 부활 주일을 보내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가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지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결코 값싼 그 어떤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그저 입술로 쉽고 고백하고 인정만 하면 받을 수 있는 그런 값싼 복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온 몸이 찢기시고 모든 피를 다 쏟으셔서 완성하신 그 귀한 구원의 복음을, 우리들이 입술의 고백과 지식적 동의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변질시키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힘들게 생각하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의 믿음을 순종의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 항상 큰 도전이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이제 막 시작하신 분들에게도,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신 분들에게도, 신앙적으로 어느 정도 성숙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도, 그리스도 안에서 순종의 삶을 사는 것은 늘 도전이고 숙제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내기에는 여전히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나 스스로의 노력과 힘으로 100% 온전한 순종의 삶을 살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죠.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입술로만 고백하고 지식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그분을 만나고 그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면 우리의 그 믿음이 순종의 삶을 살아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순종의 삶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회심하고 새 사람으로 변화된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데, 누가복음 19장은 세리장이 삭개오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하고 새 사람이 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돈을 모으는 것이 삶의 우선순위였던 삭개오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삶의 우선 순위가 완전히 바뀌어 버립니다. 누가복음 198절에서 삭개오가 예수님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 받은 자의 진정한 삶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던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왔을 때 일어나는 변화의 모습입니다. 절대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돈이 전부였던 삭개오가 돈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위해 의로운 삶을 살기로 선택한 것은 삭개오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낸 순종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복음의 능력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내 스스로의 힘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 애쓰는 것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한계에 부딪히게 만듭니다. 대신, 복음의 능력이,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순종의 삶을 살게 하도록 우리 자신을 예수님께 내어 드려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하는데요,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구원 받은 자로서 온전한 순종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구원 받은 자의 삶은 그 전의 삶과 분명히 달라야 합니다. 완전히 새로운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 가운데 주인으로, 구세주로 영접했다면 그에 합당한 순종의 삶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이제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 예수님, 그리고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다시 이 땅 가운데 오실 그 예수님을 기다리며 구원 받은 자의 온전한 삶을 살아내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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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2019.11.24. 감사습관 맨하탄한인교회 2019.11.27 43
43 2019.11.17. 없으며 없을지라도 맨하탄한인교회 2019.11.20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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