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구원
(마 1:21)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23)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창조과학회라는 기관이 있습니다. 노아홍수 등 성경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하여 일하는 기관입니다. 그 창조과학회에서 컴퓨터를 통하여 예수님의 출생사실을 알아보았는데 실제적으로 예수님이 태어났던 시기에 큰별이(혜성) 지구가까이까지 왔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우리가 알고있는 내용과 다른점은 성탄절이 12월25일이 아니라 4월달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출생연도도 BC 4년이라는 사실도 밝혀졌습니다. 우리가 알고 지키던 성탄절과는 시기가 달라 조금은 성탄절기분이 나지는 않지만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예수님이 오신 성탄절을 왜 즐거워해야 하는 지 그 이유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성탄절이 기쁜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려고 찾아 오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구원받으셨습니까? 그렇죠 구원받으셨죠. 그런데 무엇으로부터 구원받으셨습니까? 예 우리는 하마터면 지옥갈뻔한 자들이었는데 우리가 지옥으로부터 구원받았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선포합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죄인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과는 달리 모든 사람들이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죄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뿐만아니라 우리속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거리끼는 마음을 주십니다만 그것을 무시하고 내 욕심대로 살아가는 것 그리고 우리의 미래가 내손에 달렸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 죄는 어떤 행동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태도, 동기, 본성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내가 왜 죄인이냐고 묻습니다. 혹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은 하지만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의 이 말씀은 우리가 죄를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잘못된 삶이 우리를 축복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잘못된 삶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어지게 만들고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에 대한 결과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로마서 2장 6절에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라고 말하며 로마서 6장 23절에선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선포합니다. 육신의 죽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놓쳐버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는 것이고 그 결국은 지옥의 형벌입니다.
사람들은 이 죄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좋은 일들을 하려고 합니다. 혹은 자신을 괴롭게 하는 고행을 통해 죄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으로 죄문제는 해결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해결책 요한복음 3장 16절에선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1장 7절에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합니다.
죄의 문제는 우리가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해결책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함에 따라 하시는 일이고 죄인은 겸손히 그것을 받아야 합니다.
성탄절이 기쁜이유는 우리를 죄와 사망과 불행과 저주로부터 구원하여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의 이름을 계시하시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누가복음에는 한 중풍병자가 등장합니다. 몸의 일부나 전부가 마비되었을 것입니다. 혼자 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혼자 움직일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병을 고치실 수 있다고 믿고서 네 사람의 도움을 받아 예수님 앞으로 나아옵니다.
“예수께서 지붕을 뜯어서라도 예수님으로부터 고침받게 하려고 하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20). 선언하셨습니다.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다른 번역본에는 “친구여”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보면 “작은 자야”라고 부르셨습니다. 어린 아이나 아들을 부를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친근하게 부르시면서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중풍병자가 병 고침을 받기 위해 나온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병이나 장애가 있는 것, 큰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죄와 연관지어 생각했습니다. 욥에게 친구들이 와서 회개하라고 말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인 자에 대해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어볼 때, 이 사람이 맹인된 것이 그의 죄 때문인가 부모의 죄 때문인지 물어봅니다. 중풍병자는 그런 사회 속에서 살아가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큰 죄를 지어서 이런 중풍병에 걸린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람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리라”
그가 죄사함을 받은 것은 예수님이 병 고치는 능력이 있음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구원받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가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은 사가랴가 세례 요한이 태어났을 때 그를 보고 예언했던 말씀에서도 나타납니다.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눅 1:77). 실제로 요한은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눅 3:3). 그는 계속 죄 사함을 소개하는 역할을 했는데 이제 그 죄사함을 선포하는 일을 하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중풍병자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사람들과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일이 죄 사함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너의 죄가 사해졌다는 선언을 받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죄 있는 사람을 용서해 주실 수 있기 위하여 우리 대신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은혜로우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있을 십자가 사역에 기초해서 중풍병자에게 죄가 사해졌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21). 그들은 예수님이 신성모독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유는 죄를 사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을 사칭해서 말하는 사기꾼처럼 여겼습니다. 이들이 잘못된 결론을 내린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친히 희생제물이 되실 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중풍병자의 죄가 사해질 것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24절에서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너희에게 보여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고침으로 그것을 증명하겠다는 것입니다. 24절에서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어려운 말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성취되는 것을 보여줌으로 죄를 사함이 성취되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것입니다.
이 치유 사역이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분명히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죄를 사하는 권세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은 인색하시지 않으십니다. 오래 참으시고 은혜로우시고 긍휼이 많으십니다. 죄인의 죄를 용서하시길 원하십니다. 우리를 찾아오셔서 회개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보시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죄 사함도 필요없이 여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죄 사함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면 그분께 나오십시오. 주님께서 그런 자를 절대 내어 쫓지 않으십니다.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탄절이 고맙고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가지고 이 땅에 우리들을 찾아오신 주님을 환영하는 것입니다.
성탄절이 왜 기쁜 절기이냐 하는 것은
둘째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은혜를 누리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23절)
유대인에게서 하나님은 높이 그리고 멀리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두려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시내 산에서 우레소리와 함께 연기와 구름가운데 임하시던, 도무지 접근할 수 없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범하면 3, 4대까지 징벌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설혹 죄를 용서하신다고 할지라도 그 죄 값을 반드시 갚으시는 철저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안 계셨다면 우리는 이런 하나님만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항상 조마조마 해야 되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야 되고,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14:9)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14:11) 우리에게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확 바꾸어 놓았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통해서 알게 된 그 하나님이 어떻게 마음에 와 닿습니까? 어떤 하나님의 모습으로 그려집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임마누엘 되신 하나님, 세상에 오신 하나님, 내 곁에 오신 하나님, 나를 만나주신 하나님,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그 사람의 인격 안에 혁명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처음 대중 앞에 나타나셨을 때 어떤 모습이셨습니까? 우리가 얼마든지 가까이 가서 그분의 옷자락을 잡고, 그분의 눈에 눈동자를 맞추면서 얼마든지 친구처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평범하고도 평화로운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대중 앞에 나타나셨을 때 가난한 자들, 고통당하는 자들, 세상에서 짓밟히는 자들에게 제일 먼저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들을 일일이 찾아가 가까이 하며 함께 식사하고, 그들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해주마.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비록 세상에서는 고생하고, 고통하고, 짓밟히지만 하나님은 너희를 사랑하셔서 그분의 자녀로 삼으시고 나 예수를 믿기만 하면 영생을 선물로 주신다고 하시면서 그들의 가슴 속에 소망을 불러일으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내가 울 때 내 곁에서 함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하나님, 내가 좌절하고 앉아서 일어나지를 못할 때 내 곁에 와서 내 손을 붙들고 일으켜주시는 하나님.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예수님 때문에 '아, 하나님이 이런 분이구나!' 하는 것을 비로소 발견한 것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은 옛날처럼 멀리 보이던 하나님, 높이 보이던 하나님이 아닙니다. 내 안에 나와 함께 내 곁에 계시는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알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생명되시니 구주예수 떠나갈 때 죄중에 빠지리 눈물이 앞을 가리고 내 맘에 근심 쌓일 때 위로하고 힘주실 이 주 예수"(찬송93장)
이 찬송은 함부로 부를 수 있는 찬송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발견했기 때문에 부를 수 있는 찬송입니다. 눈물이 앞을 가리고 근심에 짓눌려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뭐가 아쉬워서 그 옆에 와 계시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아니다. 진짜 사랑의 하나님은 네가 울 때 네 옆에 있단다. 너의 눈물을 씻어 주신단다. 어떤 때는 너와 함께 울기도 하시지. 네가 근심에 쌓일 때 그 근심을 덜어주려고 네 곁에 다가오시는 하나님이시다." 이것을 우리에게 알게 해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은 멀리 보이고 높이 계시는 거룩하신 분이지만, 그 하나님을 우리 가까이에 접근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우리 가슴으로 느끼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그 하나님 때문에 울고, 웃고, 찬양하고, 어떤 때는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도록 만든 배경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 곁에 와 계시다는 것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이런 하나님을 알고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가슴을 움직이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의 은혜입니다.
다일공동체를 운영하고 계시는 최일도 목사님을 많이 아실 것입니다.
그 목사님이 서울 청량리 역 근처에서 소외되고 굶주리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신학대학원 졸업반 때, 평소 시를 잘 쓰시던 목사님은 이 일을 위해 춘천으로 가려고 청량리 역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청량리 역 마당을 지나갈 무렵, 갑자기 자기 앞에서 어떤 노인이 푹 하고 쓰러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침 갈 길이 바빠 다른 사람이 와서 도와주겠지 하고는 그냥 스쳐 지나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차를 타고 춘천에 가서 하루 종일 시를 쓰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또 다시 기차를 타고 저녁 나절이 되어 청량리 역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광장으로 나오면서 충격적인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날 아침에 쓰러졌던 노인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려가 그를 일으켜 세우고, 하루 종일 이렇게 있었는지, 뭐라도 드셨는지 물었더니 아무것도 못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노인을 부축하고는 근처 식당에 가서 식사를 시켰습니다. 그러면서 이 목사님의 가슴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내가 앞으로 목사로서 어떤 사역을 해야 될까? 이렇게 굶주리고 외롭고 힘들게 사는 사람을 위해서 내 인생을 바치자."
그래서 독일로 유학 가려던 꿈도 접고 청량리 역 근처를 자신의 목회지로 삼고는 지금까지 사역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굶주린 노인들, 부랑아들, 창녀들을 위해 손수레에 버너와 라면을 싣고 다니면서 그들을 먹이는 사역을 지금까지 해오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일전에 한번 들려 드렸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또 언급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최일도 목사님을 통해서 목사를 만난 그 사람들이 갖는 목사의 이미지는 과연 무엇일까요? 아마도 가난할 때 가까이 와주는 사람, 먹을 것이 없을 때 먹을 것을 가져다 주는 사람, 자기들과 같이 울어줄 수 있고 웃어줄 수 있는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목사를 떠올릴 때면 정서적인 따뜻함을 마음 속으로 느낄 것입니다.
예수님이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가까이 보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가까이에서 어떤 분인가를 세밀하게 느끼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마음속에 찾아오신 주님을 통해서 우리는 삶의 고통과 고독과 고난가운데서 구원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다음주일에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미 임마누엘 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 끝날 까지 항상 나에게 임마누엘이 되어 주십니다!! 여러분, 어떠한 경우에서라도 나 혼자라는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왜 혼자입니까? 주님께서 나와 동행하시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조차도 나와 함께 하여 주시는 분이시거늘 왜 혼자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번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며, 임마누엘 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늘 힘차게 도약하며, 승리하는 우리의 죄로부터의 구원뿐만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서도 구원을 받으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