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이 있는 자(눅11:27-32)
(눅 11:28)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눅 11:29)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몇 년전입니다. 이웃교회 교인이 협의회 목사님들에게 자기교회 목사님이 좀 이상하시니 과연 신학교를 제대로 나오셨는지? 건전한 신학교인지를 좀 알아봐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알아본 결과 졸업하셨다는 신학교는 현재 존재하지도 않고 목사안수여부도 명확하지가 않아서 결국은 그 목사님은 사역을 하지 못하고 떠나신 적이 있습니다. 남을 의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는 않으나 사실 여부를 확인해 보는 것은 서로를 위하여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표적을 구했습니다.
당신이 정말 메시아라면 분명한 증거를 보여 달라는 것인데 인간이 할 수 없는 부분을 해낸 사실을 통하여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을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에 대한 표적을 구할 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시며 표적을 구하는 것을 악하고 음란한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2:39).
그러면 예수님께 표적을 구하는 것이 왜 악하고 음란한 일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그동안 이미 많은 표적을 보여주셨읍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메시야성을 의심하여 문의해 왔을 때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맹인의 눈을 뜨게 해주시고, 말 못하는 자의 입을 열어 말할 수 있게 해주시고, 심지어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를 말씀 한 마디로 다시 살려내신 사실을 말씀하심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야 되심의 분명한 표를 보여 주셨습니다.
누가복음에만 살펴보더라도 4장에서 시몬의 장모를 고치셨고 5장에서 나병환자를 고치셔고,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시고 고쳐주셨고 7장에서 백부장의 종을 고치셨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 주셨고 8장에서 혈루증 앓던 여인을 고치셨고, 군대귀신들린 자를 고치셨고, 광풍을 잔잔케 하셨고, 회당장의 딸을 살리셨고 9장에서 5병2어로서 5천명을 먹이시는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표적을 많이 보았읍니다. 그것들만 가지고도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을 확신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았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불신앙적인 사람들에게 보여줄 마지막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이란 물고기 배속에 들어갔다 나왔다는 것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요나처럼 죽었다가 다시 살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후 부활하셔서 다시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요나의 표적이란 다름 아닌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이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표적은 예수님께서 그 때까지 보여주신 모든 표적들, 병든 자를 고친 것, 귀신을 쫓아낸 것,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 이상을 먹이신 것, 물 위를 걸으신 것 등 그 어떤 표적보다도 수 백 배, 수 천 배 위대한 표적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보여주신 최고의 표적입니다. 513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보여주실 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입니다. 표적을 보았으면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또 예수님께서 사흘 후에 부활하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이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탄식하셨읍니다. 예수님의 수많은 이적들, 그분의 놀라운 말씀, 그분의 겸손한 성품에도 이들은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최후의 판결은 ‘악한 세대’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사람의 기준에서 보면 가장 종교적이고 가장 도덕적인 사람들이었고 가장 하나님과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정작 하나님의 기준에서 보면 악한 자들이었다는 것이 예수님의 판결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왜 표적을 보고서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 들이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두세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나사렛 사람이라고 하는 출신 때문에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리라는 예언과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사실을 몰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는 메시야에 대한 잘못된 기대치 때문입니다. 그들은 로마를 쳐 부수고 유대를 독립시켜줄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대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구세주로 오셨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잘 알지를 못했습니다.
셋째는 그들의 교권이 예수님에 의해서 상실되는 것을 우려해서입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 들이지 않았고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악한 자들이라는 정죄를 당하였습니다.
간혹 초신자들이나 불신자들 가운데서 저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면 믿겠다는 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간혹은 꿈에 예수님의 모습을 보기도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믿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그런 체험을 통해서 예수믿는 경우는 드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과정은 성령의 인치심을 통해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실 때 사용하시는 도구는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펴서 읽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분주한 마음이 아닌, 차분하고 조용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으십시오. 그러면 주님의 음성을 들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뜨거워짐을 느낄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더욱 분명해질 것입니다.
기독교는 표적을 보여 주는 것으로 믿음을 줄 수 있는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을 믿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아무리 큰 표적을 보여 주어도 믿음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에서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저는 지금도 말씀의 능력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대단하거나, 제가 무엇을 알기 때문에 설교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부족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을 구원하고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여러분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고, 복되게 하고, 능력있게 하시길 기원합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말씀 앞에서는 완악하던 사람도 순한 사람으로 바뀝니다. 말씀 앞에서 의심의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말씀을 정직하게 받으면 누구나 회개하게 됩니다. 그 예리한 검 앞에서 쪼개지지 않을 마음은 없습니다. 그 맑고 밝은 말씀의 거울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말씀 앞에서 우리는 변하여 새 사람이 될 것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신앙은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이미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십자가를 붙잡고, 예수님을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행적과 믿음의 사람들의 행적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어보십시요 날마다 책을 펴서 읽는 순간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표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의 심령 속에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케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을 기적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것은 그 기적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인가 말씀하시려는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표적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인터넷 뉴스와 TV를 통해 세상에 수많은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터넷뉴스와 TV를 보며 ‘또 사건이 일어났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의 눈이 열린, 믿음의 사람들은 그렇게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주님께서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까.’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 하나하나를 통해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설교를 듣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려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를 듣고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하지않고 기적이 일어나기만을 바라는 사람들은 본문에 나오는 표적을 구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과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을 받드는 것입니다.
2.표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과 귀신을 쫓은 일로 논쟁을 하실 때에 한 여인이 음성을 높여서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마리아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마리아가 위대한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말은 맞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가 복이 있는 여인이라고 말하지 않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에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복된 여성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장 28절을 보면 천사가 와서 마리아에게 한 말이 나옵니다.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또 세례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도 다음과 같이 축복했습니다.
누가복음 1장 42절을 보면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마리아도 자신이 복 있는 여성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장 46-48절을 보면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리아보다 더 복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2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마리아도 복이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는 더 복이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듣다’라는 말은 단지 귀에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고 마음을 집중해서 듣는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듣는 실례가 누가복음 10장 39절에 나옵니다.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리아는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처럼 말씀을 듣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가 복이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복이 있다고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을 다해 듣는다는 것은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듣고자 하는 자는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설교를 단지 예배의 일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말씀을 듣는다면 그 말씀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까?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듣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복된 일이지만 순종하기 위해 듣지 않는다면 이는 진짜 복된 것이 아닙니다.
성겨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킬 때 복을 받는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8장 1절 이하를 보십시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그런데 여기서 질문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여 명예와 물질과 자녀의 복을 받으면 행복하냐 입니다. 만일 물질이 많은 것이 복이라면 부자는 다 행복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부자라고 다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자녀가 복인 것은 맞지만 자녀가 많다고 다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행복은 내가 명예를 얻고 물질이 많아지고 자녀가 많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실천할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다른 번역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행복하다고 번역했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행할때보다 행복할 때는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우리에게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행함이 없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고 말한 것입니다.
에덴동산은 모든 갖추어진 곳이었지만 아담과 하와가 마귀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을때에 그 모든 축복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행복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때에 주어지고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의 소원은 성령충만함입니다. 그 이유는 제가 무슨 성령의 은사를 자랑하기 위함도 아니고 능력행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살고 싶은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안타까울 때, “아버지, 내 힘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하게 하셔서 말씀대로 살 수 있게 해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죄와 싸워 이기며 살고 싶은데, 자꾸 넘어지고, 죄를 자꾸 범하여 괴로울 때, “아버지. 제 힘만으로는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성령 충만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저를 도와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담대하게 나아가서 전도하고 싶은데, 용기가 없고 힘이 없을 때, “아버지, 제 힘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사오니 제게 성령 충만함을 허락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정말 큰 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복은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복의 개념을 바꿔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돈이 많고 권력이 많고 명예를 얻은 것을 복을 받았다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실패한 삶같이 보였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자가 진정으로 복 있는 자입니다. 이런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