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없는 집
(눅 11:24)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눅 11:25)가서 보니 그 집이(마 12: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눅 11:26)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마12: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1.왜 빈집이 위험합니까?
빈집이란 주인없이 방치된 집을 가리킵니다. 주인없이 방치된 집이 왜 무서울까요?
그것은 주인잉 없고 사는 사람이 없으면 안좋은 부류의 사람들이 그곳에 찾아들기 때문입니다.
“단돈 1불에 건물 한 동을 드립니다. 그러나 반드시 본인이 들어와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황폐해져 가는 도시를 되살리기 위해서 수년 전 뉴욕시가 고육지책으로 내놓은 광고문 입니다. 뉴욕 일부분의 도시에서 사람들이 다 나가 버리고 빈집이 되니까 단돈 1불을 주고 들어와서 살아 달라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파격적인 제안에도 불구하고 그 도시로 건물을 사러 오는 사람들이 없었다고 합니다. 백인들이 살고 있던 곳에 흑인들이 이주해오기 시작하자 백인들이 순식간에 그 지역을 빠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도시는 텅 비게 되고 사람들이 살지 않는 빈집들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이사 오는 사람도 없자 부랑자들과 노숙자들이 빈집을 자신들의 거처로 삼아 생활하며 결국 그 도시는 마약과 범죄가 들끓는 지옥처럼 변하고 만 것입니다.
오늘 읽으신 성경내용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쫓겨난 귀신이 이리저리 돌아 다녀 보았지만 자기가 거할 쉴 만한 처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귀신은 할 수 없이 전에 자기가 살던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집은 비어있고 귀신의 취향에 맞도록 새롭게 수리되었고 집안 청소까지 깨끗하게 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귀신은 너무나 좋아서 이제는 두 번 다시 쫓겨나지 않으려고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들을 일곱이나 데리고 들어 왔습니다.
일곱귀신을 데려왔다는 것은 온갖 귀신을 다 데리고 온다는 것입니다. 거짓말하는 귀신이 들어오는가 하면 추한 귀신, 악한 귀신, 도둑질하는 귀신, 음란한 귀신, 방탕한 귀신, 술취하는 귀신, 도박하는 귀신, 살인 귀신 온갖 귀신이 다 들어와서 난장판을 치기 때문에 그 집이 말로 다할 수 없이 황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바람에 집 주인은 전보다 더 형편이 비참해 지고 말았습니다.
귀신은 하나님을 거역한 타락한 천사들입니다. 성경에 보면 사단, 마귀, 귀신이 나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령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시험하고 미혹하여 인간의 영혼을 사냥하여 지옥으로 인도하는 영물들입니다.
귀신은 인간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귀신은 인격을 소유하고 있으며 기적 같은 것을 일으켜 사람들을 속이면서 섬김을 받기도 합니다. 귀신들은 그들의 두목인 사탄의 활동을 돕고 있습니다. 사탄은 자기 졸개들인 귀신들을 통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거짓말을 하게 하고. 죄를 짓도록 시험하며 진리를 믿지 못하게 유혹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고 위협하고 괴롭혀서 자신을 섬기게 합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인간은 두 종류의 집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귀신이 거하는 처소인 귀신의 집이 있고 성령이 거하는 전인 신령한 집이 있습니다.
성경은 증거 하기를 (고전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우리속에 들어오실려면 우리의 의향을 물으시고 우리가 초청해야 들어오시는데 귀신은 막무가네로 쳐 들어 옵니다.
24절에서 귀신이 들었던 사람을 귀신은 자기가 돌아갈 집이라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기가 창조한 것도 아닌데 마치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자기가 돌아갈 집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할 수 만 있으면 사람속에 들어올려고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내가 주인으로서 내 몸을 움직이고 살아가는 데 귀신은 자기 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웃기기도 하고 두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든지 상관없이 귀신은 우리의 몸을 자기집이라고 여기고 실제로 마음대로 들락거린다는 사실입니다.
인간내면에는 하나님이시던 마귀든지 들어올 수 있는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문제는 이러한 비어있는 집을 사단이 들어올려고 찾아 헤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서 주인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아 나서고 있습니다.
글개서 베드로는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주인이 없어 비어 있는 집은 어김없이 마귀의 표적이 되고 마귀의 밥이 되고 맙니다.
오늘 성경에서 읽는 놀라운 표현은 잘 수리하고 잘 깨끗하게 청소된 그러나 비어있는 집이란 표현은 누구를 가리키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석가들은 바리새 교인들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하루세번씩 기도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경건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마귀의 표적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를 모시지 못한 비어있는 집이었기 때문입니다.
'비어 있다'는 말은 ' 무가치하다, 생명이 없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인이 없는 빈집은 삶의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고, 생명의 감격도 없는 공허한 삶을 말합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인 없는 빈집처럼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삶의 주인이 없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삶의 의미와 보람 그리고 목적도 없습니다. 감동도 없고 생명력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공허감과 무의미에 시달리는 인간상태를 그는 철학적으로 이렇게 불렀습니다. '존재적 진공상태'라 그랬습니다.
많은 현대인들이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지 의미와 확신을 모르고 삽니다. 공허감과 무의미에 시달리는 현대인을 '존재적 진공상태'라고 합니다. 존재적 진공상태가 빈집일 것입니다. 사람은 멀쩡한 것 같은데 속이 텅 비었습니다.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자신의 할일을 알지도 찾지도 못한 희망과 열정이 없이 사는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달란트 비유를 볼 수 있습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주인으로부터 자기의 몫을 받은 순간 왜 주인이 이를 내게 맡겼는지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보였습니다. 그들은 주인이 떠나자 즉시 움직였습니다. 사는 것과 일하는 것이 의미가 있고 목표가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음 사람은 주인이 자기에게 한달란트를 왜 주었는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보이지도 않고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아무 일도 안하고 한 달란트를 가지고 주인에게 왔습니다. 이제 주인은 책망하십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게으르다는 말은 이해가 되지만 악하다는 말은 좀 지나친 것 같지 않아요? 왜 악하냐? 아무 일도 안 했으니까 악한 거죠. 여러분, 아무 일도 안한다는 것이 그것이 죄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 보면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만난 사람이 누워서 지금 죽음 직전에 있어요. 제사장이 보고 지나가고 레위 사람이 보고 지나갔습니다. 그들에게 묻는다면 "나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노라. 내가 누굴 죽인 것도 아니고 누굴 미워한 것도 아니고, 나는 죄가 없노라"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도와주지 아니한 것은 너는 죄인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높은 차원에서 죄의 개념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폴란드에 그 히틀러 정권, 나치 정권이 폴란드를 침공하고 있을 때 말입니다, 그때에 그 젊은이들이 레지스탕스를 만들어가지고 저항운동을 했죠.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정의를 위하여 지하에서 조직적으로 저항운동을 하다가 많은 청년들이 잡혀서 죽었습니다. 그 레지스탕스, 그런 청년들이 붙들려가지고 지금 트럭에 실려서 사형장으로 나가고 있는데 그 안에 왜 이렇게 막 체포하다 보니까 레지스탕스가 아닌 장사치 하나가 거기에 붙들렸어요.
그리고 하는 말이 "나는 죄 지은 게 없습니다. 나는 레지스탕스가 아닙니다. 나는 그저 다만 여기저기 다니면서 장사만 했을 뿐이지 나는 아무 일도 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고 자꾸 사정을 합니다. 레지스탕스 청년 한 사람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맞는 말이요, 당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어 마땅하오."
2. 귀신이 몸속에 들어오려는 이유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귀신을 그냥 귀신이라고 말하지 않고 더러운 귀신이라고 했습니다.
왜 귀신을 더럽다고 했을까요? 목욕을 하지 않고 더러운 오물들이 귀신에게 묻어 있기 때문에 귀신을 더럽다고 했을까요? 아닙니다. 귀신이 더러운 것은 인간에게 더러운 마음을 주기 때문에 더러운 귀신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도덕적 불결로 이끌어 더러운 생각을 하게하고 더러운 말과 행동을 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귀신이 인간의 마음의 집에서 주인 노릇을 하게 되면 인간의 성품은 귀신을 닮기 때문에 인간도 귀신처럼 더러워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가 비록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그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은 악한 생각과 그리고 악한 행동과 악한 말이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생각하는 것도 악하고 행동하는 것도 악하며 말하는 것조차도 남에게 덕을 끼치지 못하는 악한 말만 하게 됩니다.
처음에 가릇 유다가 예수님에게 부름을 받고 제자가 되었을 때에는 귀신이 그에게 얼씬거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그에게 돈궤를 맡겼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바람에 그는 결국 귀신을 마음의 집에 주인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귀신이 그의 마음에 주인 되자 가릇 유다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게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26:15절에 보면 그가 예수님을 파는 일에 있어서 은 삼십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흥정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가릇 유다가 단 한 순간의 충동이나 한 순간의 잘못된 오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귀신이 그의 마음의 집에 주인으로 군림하므로 예수님을 배도 하는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가릇 유다의 종말은 어떻습니까?
가릇 유다는 돈 귀신에게 지배를 받아 돈을 사랑하게 되었고, 돈을 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돈 귀신은 유다로 하여금 회개할 기회를 주지 않고 나무에 목을 매여 자살하도록 하여 그 영혼을 지옥으로 끌고 갔습니다.
마음의 집에 귀신을 주인으로 삼는 사람의 형편은 보편적으로 귀신은 질병으로 고통을 줍니다.
같은 예를 우리는 마가복음 9장에서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어릴 때부터 벙어리 되고 귀먹은 아이를 고친 일입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아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오자 예수님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는 들어가지 말라”고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는 정상아로 회복되었습니다. 그 병도 역시 악한 영 때문에 일어난 병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이 나면 병원으로 갑니다. 물론 병원도 가 봐야 하지만 그것만을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한번쯤은 질병의 원인에 대해 신앙적으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 마귀의 역사로 판단되면 예수 이름으로 꾸짖어야 합니다. 더러운 병마야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몸에서 떠나갈지어다 라고 예수 이름으로 대적할 때 귀신은 더 붙어 있지 못하고 떠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귀신은 환경을 통해서 역사 합니다. 괴로운 환경에 처하게 되면 흑시 나의 잘못으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인지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 잘못한 것이 있으면 회개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 이름으로 환경을 괴롭게 하는 마귀야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떠나갈지어다라고 예수 이름으로 대적할 때 괴로움을 주던 환경과 하나님 앞에 나오지 못하도록 시간을 빼는 귀신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언제나 택한 자라도 찬송과 기도와 말씀을 배우지 않고 경건의 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들어가 질병을 주고 망하게 하고 그 영혼을 멸망시키기 위해 역사 합니다.
3. 성령이 임하시는 이유
(요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눅 11:20)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눅 11:21)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주인이 들어와서 집을 차지하고 있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주인은 들어오면 집을 잘 소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너진 것을 다 수리하고 정리하고 집을 아름답게 꾸미지 않습니까?
세를 든 사람은 자기집이 아니기 때문에 그 집을 잘 돌보지 않습니다.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고 나갈 것이므로 수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들어오면 그 집을 잘 소재하고 수리하고 정리하고 아름답게 미화합니다.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아무리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파괴 되었을지라도 주인인 주님께서 우리 속에 들어와서 성령으로 임재하여 계시면 우리는 완전히 변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주인이 팽개쳐 놓은 집이 있을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인은 자기 살집을 언제나 소제하고 수리하고 정리하고 정돈하고 미화합니다.
주인이 들어오면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새사람이 되도록 우리를 소재하고 수리하고 정리하고 미화시키는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의롭게 거룩하게 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안됩니다. 율법을 통해서 우리가 의롭고 거룩하게 될 수가 없습니다.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에 보면 한 사람이 어느 집에 갔는데 그 집에 먼지가 자욱한데 청소를 한다고 빗자루를 들고 먼지를 쓰는데 쓸수록 먼지가 더나서 온집에 먼지가 자욱해졌습니다. 먼지는 죄를 의미합니다. 율법주의로는 절대로 사람이 깨끗하게 안됩니다. 그 다음 옆방에는 깨끗한 방이 있는데 물청소가 잘되어 있습니다. 이 물은 성령의 은혜를 말합니다. 사람이 깨끗하게 되는 것은 율법의 빗자루로 쓸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혜로써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죄악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율법적인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은혜가 역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해방시켜 주고 항상 우리와 함께 있으므로 해방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들어오시면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행복과 보화가 있는 곳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으로 우리 마음을 채워 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은혜로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도록 우리에게 채워 주시는 것이 주인이 하시는 역사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3장 17절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라고 말씀합니다.
주인이 계시면 사랑이 우리 마음 속에 넘쳐 나게 됩니다.
어떤분이 교인들을 다음과 같이 분류해 놓았습니다.
빈집 교인도 있습니다. 빈집 교인은 형식과 의식적으로 교회에 나오지만 속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교인인 것입니다. 그런 빈집 교인은 왔다갔다 하다가 마귀에게 잡혀서 도둑질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교인은 별장 교인입니다. 별장은 1년에 몇 번 왔다갔다 하는 곳입니다. 교회에 크리스마스때, 부활절, 특별한 계절에나 한번씩 들어와 보고 나가는 별장 교인, 이 사람들도 빈집 교인인 것입니다. 언제나 마귀의 유혹과 시험에 빠져 넘어질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말 교인이 있는 것입니다. 주말에 한번씩 찾아가는 주말교인, 주말에 교회에 한번 와보고 그 다음에는 성경과 이별하는 것입니다. 일주일 내내 기도는 한번도 안하고 성경도 안읽다가 주일이 되어 한번 교회에 왔다가는 이러한 교인도 마귀의 유혹에 빠질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교인이 되어야 할까요?
상주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일주일 내내 주님께서 마음 속에 와서 계시는 주인이 계시는 교인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주님께서 우리 마음을 성령으로 깨끗이 소제해 주시고 우리를 수리해 주시고 우리 속에 보화를 가득하게 채워 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좋은 하나님이시라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 놓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언제나 좋은 일을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용서와 의로 채워 주시고 거룩함과 성령충만으로 채워 주시고, 영생복락의 희망으로 넘치게 해주셔서 새로 주인이 있는 집은 영혼이 잘 되고, 범사에 잘 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넘치는 집이 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1장에는 예수께서 말 못하게하는 귀신을 쫓아내신 후에 바리새인들의 험담에 논리적으로 대응하시면서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것은 하나님의 손을 힙입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누가는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었다고 말하지만 마가(3장)와 마태(12장)는 ‘성령’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께서 성령으로 귀신을 쫓아내신 것은 곧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징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것을 보면서 예수님의 능력에 놀랍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귀신을 쫓아내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증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귀신이 쫓겨나 곳에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주기도의 두 번째 기도는 ‘나라가 임하시오며’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성령충만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귀신은 쫓겨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또 이 말씀을 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21-22절입니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께서 자신이 더 귀신보다 강하시기 때문에 귀신을 쫓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충만함으로 주님의 통치를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으로 창조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시지 않은 집은 빈집이 되고 빈집을 오래 그대로 두면 일곱 귀신이 들어와서 난장판을 치고 폐허로 만들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곱귀신이 들어온 집은 우환, 질병, 고통이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기쁨과 평안과 행복은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아버지를 섬기며 성령의 은혜 가운데 주인있는 집이 되는 것이 바로 그 축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빈집의 우환을 당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빈집이 되어서 우왕좌왕하고 혹은 빈집에 일곱귀신이 들어와서 황폐하게 된 심정을 가지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삶의 진실한 기쁨과 소망과 사랑을 갖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인이 들어오는 것이고 그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성령의 능력으로 빈집을 소제하고 예수님의 은혜로 수리하고 정리, 정돈해서 보화로 가득채운 영혼이 잘 되고 범사에 잘 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우리들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