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간청함을 인하여(눅 11:5-13)
(눅 11: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눅 11:6)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눅 11:7)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눅 11: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눅 11: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눅 11: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눅 11:11)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눅 11:12)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눅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최근에 한 권사님으로부터 기쁜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교회를 나가시지 않으시던 남편이 다시 교회생활을 시작하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저도 그 권사님께서도 사랑하는 가족이 다시 교회생활을 시작할 수 있게 되기를 위해서 많이 기도해 왔었는데 남편분의 마음속에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다시 교회생활을 시작하셨다는 소식이 무척 마음이 기뻤습니다. 그러면서 그 남편되시는 분이 겪었던 기도의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오래전에 가게에 대어둔 추럭을 잃어 버렸답니다. 그래서 하나님앞에 간절히 기도드렸는데 하나님께서 반드시 도둑맞은 자동차를 찾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해 주셨고 정말 분실한지 며칠 되지 않아서 자동차 타이어만 분실한 채 자동차를 찾을 수 있게 되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남편은 어려움이 있으면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산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간증을 들으면서 느꼈던 것은 기도응답의 체험이 있으면 하나님을 떠났어도 다시 돌아오게 되구나 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난주 살펴본대로 제자들에게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그리고 죄용서와 시험극복 등 영육간의 건강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은 이어서 말씀해주신대로 응답받는 기도의 자세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교우들도 기도드리면 응답받는 기도의 성공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기도할 때는 간청함으로 기도를 드려라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이런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밤늦게 여행 중에 있는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요기라도 시켜 줄려고 보니까 남아있는 밥도 없고 라면도 똑 떨어졌습니다. 마침 노는 날이라 가게도 문을 다 닫았습니다.
하는 수 없어 염치 불구하고 이웃집에 가서 잠든 사람을 깨웁니다. 거실의 불도 꺼지고 기척도 없습니다. 그래도 계속 초인종을 눌럽니다.
집사람이 잠자다 일어나서 무슨 급한 일인가 하여 현관문을 열고 내다 봅니다.
사정을 말씀드립니다. “혹 빵을 사다 놓은 것 있습니까? 손님이 갑자기 찾아왔는데 가게도 다 문을 닫았고 그를 굶긴 채로 재울 수가 없네요.”
시간도 늦었고 날도 몹씨 춥고 귀찮은 일이나 그 모든 상황을 잘 아는 이웃이 요청하는 일이니 하는 수 없이 냉장고에서 먹다 남은 방이나 음식을 꺼내 드립니다.
그러시면서 하신 말씀은 (눅 11: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그러면 간청함으로 하는 기도란 어떤 기도를 가르칩니까?
1)열심과 끈기로 간절함으로 간곡히 구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여기서 ‘간청함’이란 ‘끈질긴 요구, ‘집요함’, 뻔뻔스러움’으로 아무튼 ‘간청함’이란 ‘끈덕진 요구’를 말합니다. 끈덕지게 요구한다는 것은 우리의 상황이 그만큼 절박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응답받으면 좋고 응답 받지 못 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면 끈덕지게 요구할 수 없습니다. 몇 번 기도하다가 그만 두게 되지요. 그러나 그 기도제목이 살고 죽는 문제라면 금식하면서 철야하면서 끈질지게 요구하게 됩니다. 방금 전에 기도했는데 무슨 내용으로 기도했는지 모른다면, 그것은 절박한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끈덕지게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그 문제가 절박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끈덕지게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문제가 나에게 그렇게 절박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간청하는 기도의 좋은 예는 마 15장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지방으로 들어가셨을 때에 한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마가복음 7장에서는 그 가나안 여자를, 수로보니게 여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찾아 온 이 여인이, 유대인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천시하는 이방인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소리질러 말합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라고 합니다.
이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을 찾은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딸이 흉악한 귀신들에 들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흉악한 귀신에 들렸다는 것은, 지금 딸 아이가 흉악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예쁘고 사랑스럽던 모습의 딸이었는데, 이제는 귀신에 의해서 흉악하게 된 것입니다. 분명 딸 아이의 모습이 흉악한 얼굴로 바뀌었을 것이고, 그 행동도 흉악했을 것입니다.
이 수로보니게 여인은 한 여자의 모습으로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한 아이의 엄마로 예수님을 찾아 온 것입니다. 엄마는 자식의 모습이 비록 흉악하더라도 이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도리어 그것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며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 아이의 문제가 곧 자신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엄마는 예수님께 간구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부모의 시선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는 다릅니다. 자녀들의 문제가 자신의 문제가 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서 아이를 구해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서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으십니다. 곧 그녀의 소리를 무시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녀를 냉대하시는 모습을 보고, 도리어 제자들이 민망히 여기면서 예수님께 말하기를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그 엄마를 낙심케 합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한 마디로 거절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은 유대인들을 위해서 일하라고 보내심을 받았으니, 이방여인은 상대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행동과 말씀으로 이미 확실하게 그 여인을 거절하는 의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 여인이 그 이야기를 듣고 다시 예수께 와서 절합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냉대 앞에서도 무릎을 꿇고 간구하는 이 엄마에게, 예수님께서 비수와 같은 말씀을 던집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라고 합니다. 도저히 참기 힘든 모욕적인 말을, 딸 아이를 구해보겠다고 온 엄마에게 한 것입니다.
그 때에 그 여인이 말합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합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십니다.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께 있음을 믿음이 있으면 간청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2)낙심않고 항상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누가복음 18:1-8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한 과부의 이야기를 사용하십니다.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과부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과 보호가 필요한 사회적 소수자로 여겨집니다. 이 과부는 그 도시의 재판관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 하고 탄원했습니다. 그녀의 원한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나와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과부”인 것을 생각하면, 그녀의 남편과 관련된 일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습니다.
과부는 자신의 원한을 원수에게 가서 풀지 않고, 재판관에게 가서 풀어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이 재판관은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좀처럼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과부가 매일 와서 그를 괴롭히자, 마침내 그의 태산과 같은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기 위해 재판관 되신 하나님께 나아가 끈질기게 기도하는 과부입니다.
3)구할 뿐만 아니라 찾고 또 문이 열릴 때까지 두드리는 기도를 말합니다.(10절)
구한다는 것은 자기의 결핍을 인식하고 하나님께 그것을 채워주시도록 호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찾는다는 것은 구하는 것에 행동을 더한 것입니다. 즉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기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인간 스스로의 노력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두드린다는 것은 구하는 것에 행동을 더하고 그 위에 인내를 더한 것을 말합니다. 즉 구하는 자는 그것이 성취되기까지 믿음으로 바라며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종 기도를 방해하는 요소는 인간의 조급함입니다.
그들은 첫번째 노크에 문이 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문이 열리지 않을 때는 문두드러기를 그치고 돌아서 버립니다. 인간의 조급함은 기도에 있어서 금물입니다.
제가 이 간청하는 기도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희교인들은 집도 있고 재산도 있고 가진 분들인데 구차하게 하나님께 간청하며 기도할 필요를 느낄까?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신다고 했는데 구차하게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하는가? 차라리 안하고 말지! 하는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강청의 기도를 드려야 할 이유가 있다면
둘째로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서 까지 적극적으로 기도할 이유는 내 이름이 아닌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히 여김을 받고자 기도의 동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주님이 소개하신 간청하는 사람도 자기의 영광이나 필요때문이 아니라 자기집을 방문한 배고픈 친구를 대접하기 위해서 간청하고 있습니다.
또 주님은 제자들에게 기도의 내용을 가르쳐 줄때에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비록 삶이 여유로와서 간청하며 기도할 이유를 느끼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고 하나님 나라와 의가 드러나는데 필요한 것이라면 우리는 강청함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에서 강청함이란 그분의 나라와 의가 자신을 통해 드러나는 모습이 너무나 보고 싶기에 하는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내용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다는 확신이 있기에 뻔뻔함과 끈질김은 자연히 수반됩니다. 만약 자기만을 위하는 정욕과 교만이 포함되어 있다면 어딘지 모르게 기도에 힘이 빠지고 당당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2)간청하며 기도할 이유는 좋은 일 하고자 하면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질문하고 답하기를 “어찌하여 수많은 신자들이 그토록 좌절하는가? - 그 이유는 기도를 너무 적게 하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수많은 교회 봉사자들이 그토록 자주 용기를 잃고 낙심 하는가? - 그 이유는 기도를 너무 적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모든 실패 요인은 기도의 결핍이라는 점입니다
나쁜 일은 시간이 안걸립니다. 예)건강은 꾸준한 운동으로 성취됩니다.
간청하는 기도를 드려야 할 이유는 기도의 응답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때가 있기 때문이다.
예)요셉
4)간청으로 기도해야 할 이유는 사탄의 방해가 있기 때문이다.
간혹 우리는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구할 때 즉시 주시면 우리가 좋을 탠데 왜 하나님께서 우리의 애를 태우시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서를 통하여 그 의문이 풀렸습니다. (단10:11-14)
다니엘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간절히 기도에만 전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이 기도하기 시작하던 그 순간부터, 다니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의 기도에 응답으로, 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천사가 가지고 올 때, 바사국 군(君)이 막았답니다. 바사국 군은 바사 나라의 배후를 조종하고 있는 악한 세력, 악한 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로 그 악한 영이, 다니엘에게 응답을 가지고 가는 천사를, 가지 못하도록 막았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사탄의 세력은 각 지역에서, 성도들이 기도하지 못하도록,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지 못하게 막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말고,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됨을 믿고 끝까지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응답 받습니다.
새롭게 하소서에서 가독교문화연구소 장현서 장로의 간증을 들었읍니다.
그는 독실한 불교집안 사람이었읍니다. 가진 고생하면서 1000명 정도되는 기업을 벌였읍니다.
돈 벌고 나니 유희 쫓아다니고 가장 좋아 했던 사람이 점쟁이였읍니다.
동남아에 있는 모든 귀신을 자기 집 지하실에 모아 놓았다는 용하다는 점쟁이대한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갔읍니다. 점치는 사람이 많아서 한달뒤에 오라했읍니다. 한달뒤에 갔더니 그가 시퍼렇게 날이 선 작두위에 춤을 추며 점을 지는데 자기 옆에 있는 그릇을 45도 기울여 놓고 물을 부으며 “여기 물을 채워지겠습니까?” 대답않고 있으니 말하기를
“하나님이 당신 재산을 일년안에 다 날리십니다. 복채도 안받을태니 지금 교회로 나가십시요. 당신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잘 하면 일년에 회사를 하나씩 차려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교회를 나가지 않았읍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3개월 후 거래하던 모회사가 부도를 당하면서 연쇄적으로 그의 회사도 부도를 맞았는데 회사가 29억 8천 부도를 당하였읍니다. 회사가 날라가고 집의 모든 세간에 빨간딱지가 붙고 거리에 나앉게 되었읍니다. 그러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읍니다. “어떻게 그 점쟁이가 맞추었지?” 그래서 그는 점쟁이 말대로 교회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작은 개척교회였는데 나가서 설교를 듣는데 왕상 3장 4절 솔로몬의 일천번제 이야기를 들었읍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고 일천번제를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 내가 너에게 무엇을 줄꼬 너는 내게 구하라” 란 말씀을 들을 때 그의 가슴이 뜨거워졌읍니다.
그래서 그도 하나님 앞에 일천번제를 두려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읍니다. “하나님 제게 30억을 주옵소서” 그는 하나님께 메달릴 수 밖에 없었읍니다.
매일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고 수요예배 목장예배 주일예배 다 드리니까 2년만에 일천번제를 드릴 수 있었읍니다. 기도할때마다 무릎꿇고 기도를 했는데 얼마나 용을 쓰며 기도했던지 무릎이 새까맣게 멍이 들었읍니다. 일천번제를 드렸더니 하나님이 응답을 하고 30억을 채워 주셨습니다.
그 후에 그것이 우연의 일치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번 더 일천번제를 드릴탠데 그래도 하나님이 응답하시면 하나님이 응답하셨다는 확신을 가질 것이라 생각하고 2차 일천번제를 드리기로 작정하고 자녀들의 결혼을 위해서 일천번제를 시작하였는데 600번쯤 드렸을 때 이루어 졌읍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위해 일천번제 기도하리라 생각하고 주님은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라고 말씀하셨기에 하나님이 가장 즐거워하시는 것이 교회건축이라 생각하고 당시 출석하던 울산중앙교회의 교회건축를 위해서 3차 일천번제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읍니다. 그래서 울산중앙교회가 교회건축을 할 수 있었읍니다.
당시 그는 사업을 하면서 매월 선교비로 4천 5백만원을 드렸읍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기업하다 도산하면 재기하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아예 선교지에 나가서 사업을 하면 계속적으로 사업도 하고 선교도 할 수 있겠다 생각하고 해외에 사업처를 달라고 기도하며 4차 일천번제를 시작하였읍니다. 그래서 베드남 캄보디아 등지에서 사업을 하게 되었읍니다.
5차 일천번제는 그가 생각하기를 자기만 일천번제를 드려 복을 받는 것 같아서 다른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간증하여 그들도 일천번제를 통한 하나님의 복을 받게 하고 싶었읍니다. 그래서 간증하여 다른 분들도 복을 받도록 강사로 나가게 해 달라고 5차 일천번제를 시작하였는데 300회 넘어가면서 집회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는데 그 후부터 한주일도 빠지지 않고 집회를 인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몇 달치 집회스케쥴이 잡혀 있다고 합니다.
그의 간증을 듣고 도전받는 사람들이 많았읍니다. 그가 보니까 부흥되는 교회 다 이유가 있고 축복받는 성도도 다 이유가 있더라고 생각했읍니다. 그래서 그는 일천번제를 드리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냥 일천번제만 드리지 말고 다섯가지를 지켜라고 부탁하였읍니다.
이 다섯가지를 지키고 일천번제를 드렸는데도 응답이 없으면 오라 내가 책임진다고 약속하였읍니다.
첫째는 주일을 온전히 성수하라. 하나님 인자하셨다.
둘째는 목사님께 순종해라 주의 종 목사님과 싸울려고 하는 것은 그것은 바위에 계란치는 것과 같다. 만일 목사님이 도둑질을 시켜도 해라
셋째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감사를 해라 미련한 친구는 헌금얘기할때 시험드는 사람이다.
네째는 일년에 한명씩만 전도를 하여라. 않으면 내 가족 데리고 간다고 생각해야. 그후 그는 매년 전도왕을 놓친적이 없다.
다섯째 무조건 새벽기도를 해라. 새벽기도는 하나님의 속달우편이다. 축복받는 통로다. 신구약의 역사는 새벽에 다 일어났다.
지금은 캄보디아 우물사역을 위하여 7번째 일천번제를 준비하고 있읍니다.
3. 어떻게 하면 간청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요?
1) 떡 세덩이가 없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5절)
‘누가 기도하는가?’
떡 세 덩이가 없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떡 세 덩이’ 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말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결국 아쉬운 사람이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옛말에도 ‘목마른 자가 우물 판다’ 는 속담이 있습니다.
아쉬운 사람이 매달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쉬움이 클수록 간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과연 우리가 가난하고 어려움이 끊이지 않는 것이 고난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이것도 하나님의 축복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언제 하나님께 더 간절히 기도하게 되겠습니까? 여유 있고 부족함이 없을 때일까요?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면 사실 그렇게 창자가 끊어질 정도의 간절함이 나오질 않습니다.
물질이 없는 가난이든, 위급한 상황에서 도와줄 사람이 없는 가난이든, 저는 없어 가난한 것이 축복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 이유가 없는 것을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더욱 간절히 기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 것도 없으면 바지가랑이라도 잡고 늘어지는 것이 사람의 심정이듯이 바로 야곱의 기도가 그런 환경에서 나온 기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가 깊어지고 좀 더 간절해지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떡 세 덩이가 없는 우리의 현실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사를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물질이 있는 듯 하지만 모자라서 아쉬울 때가 많고, 지혜가 있는 듯 하지만 인생에 밀어닥치는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능력이 있는 듯 하지만 한계가 있어서 할 수 있는 일보다는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가졌으면 얼마나 가졌겠습니까?
머리털하나 희어지는 것도 막지 못하는 무기력한 존재가 인간이지 않습니까? 자기 기분 하나도 마음대로 조절하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을 잘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스스로 교만에 빠져 강한 척 하고 높은 척 하고 있는 척 합니다. 그러니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니 기도가 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명백히 깨닫고 인정할 때 하나님께 기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기도가 간절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아직 내 부족함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아무리 힘들다고는 하지만 아직 다급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밤에 찾아온 사람은 사실 남을 위해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언제 자기의 부족함을 깨닫게 되는지 아십니까? 바로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돕고자 할 때입니다. 무엇을 구하는 자에게 줄 것이 없음으로 자신의 부족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위로를 구하는데 위로를 줄 만한 능력이 내게 없습니다.
상처를 싸매어 주어야겠는데 싸매어 줄만한 능력이 내게 없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서 나약한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내게 아무런 떡이 없음을 인정할 때 비로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질 것입니다.
원하기는 하나님만이 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으로 믿으시고 더욱 기도로 하나님께 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2)하나님 아버지께서 선하시고 또 좋은 것을 주심을 믿어야 한다.(13절)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했습니다.
마태는 7:11절에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했습니다. 하여튼 구하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기에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실 것을 믿으며 기도하십시다.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줄 아버지가 없고,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의 고기를 줄 아버지가 없고, 달걀을 달라 하면 전갈을 줄 아버지가 없듯이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제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것은 “성령”이었습니다.
당시에 제자들이 바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회복이었습니다. 유대는 로마에 속국으로 있었기 때문에 로마를 뒤엎고 해방을 받아 유대가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보실 때, 제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것은 돈이 아니요, 자식이 아니요, 명예도 아니요, 이스라엘이 회복되어 장관을 지내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간절히 기다리며 기도를 했을 때, 오순절에 성령을 받았습니다. 제자들은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로마, 인도, 저 아프리카로 나아가 복음을 전하며 귀신을 쫓아 내고 병을 고쳤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기도하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