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 기도를 배우는 자들
(눅 11:1)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눅 11:2)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눅 11:3)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눅 11:4)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현대 지성인 기독교인들은 기도를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첫째는 기도 없이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을 받지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만약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하지 않으면 그날 무슨 사고가 일어나는 게 확실하다면 기도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겁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기도 냉소주의가 있어서 기도와 자기의 삶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현실로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사람이 하나님께 무언가를 구하는 행위입니다. 그런 행위가 진정성이 있으려면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분명해야 합니다. 이런 경험이 없거나 희미한 사람은 당연히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일상에서 기도드리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뜻이고, 하나님을 자기의 삶에서 현실로 느끼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태도로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체험이 계신 분들은 기도를 하게 됩니다.
이슬람교도들도 하루에 서너 번씩 성지인 메카를 향해서 엎드려 기도를 드립니다. 제가 김정권집사님께 들은 얘기로는 이들은 학교안에 일하다가도 시간이 되면 간단히 가리개를 치고서는 바닥에 엎드려 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대단한 열성이지요. 잣못된 신앙을 가지고서도 그렇게 열심히 기도를 드리는데 참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기도생활을 갖지 못한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저는 이 모습이 참 부러웠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부자되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도 아니고 건강을 얻는 법을 가르쳐 달라는 것도 아니고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기도하는 모습보다 경건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또 있겠습니까?
예수님 당시에 유대교에는 각종 기도 전통이 있었습니다. 150편에 이르는 시편은 다 유대교의 기도문이라고 봐도 됩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이 오늘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물론 본문을 보게되면 요한이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 것 같이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세례요한이 속했던 에세네 경건주의자들은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리며 간구하는 기도문을 가지고 늘 기도에 힘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예수님께 그러한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기도가 끝났을 때 기도를 요청한 사실을 볼 때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기도생활에서 서기관들의 기도와 다른 무언가를 발견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1.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 까닭?
예수님의 능력있는 사역의 근거가 그의 기도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다양하였습니다. 가르치시고 병을 고치시고 복음을 전하시고 상담하시고 귀신을 내어쫓고 오병이같은 능력을 행하시거나 바다위를 걸으시고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등 참 다양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능력있는 사역의 배후에 바로 예수님의 기도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많이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실 때에도 기도하셨습니다.(3:21,22)
이른 새벽 미명에 일어나셔서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4:42, 막1:35) 또, 12제자를 택하시기 전날에는 산에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습니다.(6:12,13) 또, 제자들에게 신앙고백을 요구하실 때에도 기도하셨습니다.(9;18) 변화산에서 기도하시다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형되셨습니다.(9:29) 또,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제자들이 시험에 들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22:32) 또, 십자가를 앞에 두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어 땅에 떨어지도록까지 피맺힌 기도를 드렸습니다.(22;44)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실 때에도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고 기도하셨습니다.(23:34) 이상을 볼 때, 예수님의 생애는 한마디로 기도의 생애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막 9:29에서 제자들이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라는 질문에 이르시되 “ 기도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외식기도가 만연되어 있었읍니다. 기도문을 달달 외워서하는 기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기도, 아이들이 의미없는 응알이를 하듯이 반복하는 상태 중언부언의 기도가 난무했읍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도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도는 달랐읍니다. 살아있고 대화하듯이...본질적인 다른 기도를 드렸읍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기도는 응답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아...저런 기도를 하고 싶다. 그 갈증과 목마름이 일어났읍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기도를 관찰한 제자들의 변화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놀라운 능력을 가져오게 하는 예수님의 기도를 배우고 싶었던 것입니다.
오리가 호수위에서 유유히 가는 모습이 참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아름답게 보이는 이면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오리는 쉴새없이 물속에서 발을 젖고있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눈에 보이는 사역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 즉 기도가 중요합니다.
또한 기도를 배우고 싶어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예수님 오시기전 500년 전 사람입니다. 그는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예수님 시대에 임할 축복을 다음과 같이 예언했습니다.
(슥 12:10)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이 말씀은 교회에 주실 하나님의 가장 큰 영적인 축복이 예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큰 축복은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은 우리 마음에 내주 하시고 역사 하시는 성령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 부르짖는 간구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성도들이 받아야할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입니다. 우리는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을 구하고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을 하나님께 요청할 수도 있지만 먼저 구해야 될 것은 하나님의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입니다. 그런데 그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실 때 나타난 현상은 “통곡하며 애통하리로다” 라고 예언했습니다. 애통이라고 하는 것은 회개의 음성을 보여주는 것인데 우리 마음 속 깊이 회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받아야 할 은혜가 무엇입니까. 세상의 것을 구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 하나님의 은총을 구해야 됩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심령이 임해지기를 구해야 됩니다.
오늘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에스겔 골짜기의 해골 때처럼 마른 뼈와 같이 의미 없는 하루가 될 것이며 저주받은 하루가 될 것이며 하나님 앞에 고통스런 하루가 될 것입니다.
오늘도 저와 여러분에게 성령이 충만하여 주 안에서 은총의 삶을 간구하는 기도가 더욱 커지고 더욱 간절하기를 소원합니다.
2.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
(눅 11:1)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눅 11:2)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하는 내용이 무엇이냐에 따라 기도해도 응답을 받지 못할 수 있고, 기도하지 않아도 응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를 성경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솔로몬이 나이가 어려서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께 무엇을 간구했습니까? 하나님께 백성들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를 주실 뿐만 아니라 구하지 않은 부와 명예까지도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가 함께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11-12).
그런데 세리는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그는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13절). 그런데 하나님께서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까? 세리의 기도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알아야 합니다.
1)기도의 대상입니다.
먼저는 기도의 대상으로 “아버지여!” 하며 기도를 시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버지와 같이 깊이 신뢰하므로 기도를 시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십니다. 또,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기를 심히 기뻐하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기를 즐겨 하시는 아버지십니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줌으로서 좋고 아들은 받아서 좋은 것입니다.(마7:7-11) 부모입장에서는 돈이 없어서 못해 줘서 그렇지 해주는 재미가 보통이 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아버지십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 주신 이가 무엇을 주시지 않겠느냐(롬8:32)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기도를 드릴 때, 아버지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될 때 우리는 간절한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여!’로 기도를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이 참 놀라운 기도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을 부르거나 성경을 필사할 때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면 붓을 빨고 다시쓰거나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엘로힘이라고 부르거나 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영광된 하나님을 아빠 라고 부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 말이 충격적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고 생각했기에 만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면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고 자기가 곧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1)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하면서 “너의 선한 일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을 인해 치려고 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 신성모독죄를 짓게 되어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예수님 자신 뿐 아니라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쳤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을 읽겠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이유는 하나님을 가장 가깝고 가장 신뢰할만한 대상으로 여기셨다는 뜻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친근한 자기의 아버지로 여기는 예수님의 기도의 모습에서 바리새인들이나 세례요한에게서 발견하지 못한 하나님과 친근한 관계를 느끼게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2) 기도의 내용입니다.
(눅 11:2)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첫째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름을 중요시했습니다. 이름이란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 위한 단순한 명칭의 이름도 있습니다만, 이름이 그 사람의 인격과 성품 및 전 존재를 가르친다는 사실입니다. 이르므로 하나님의 이름이란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전능과 하나님의 본질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본래 거룩한 분이시며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시는 거룩한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과 인간들의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가장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땅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잘못된 삶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욕되게 되고, 하나님의 이름이 더렵혀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를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오히려 자기 이름을 나타내고 자기 이름이 빛나기를 원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 받으시도록,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기도해야 하고 그렇게 살아가 지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기도하고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간절한 자세로 살아가 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특히, 학생 같으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직장인 같으면 그 직장 생활에서, 사업인은 그 사업을 통해서, 군인 같으면 군대 생활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그 달란트나 직업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이름이 찬송 받도록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도록 살아지게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달란트나 직업 속에서 자기 이름을 나타내고 자기 얼굴을 드러내는 욕구가 강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기도를 가르칠 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되도록 하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삶을 살면 자연히 우리의 이름도 빛나며 어디서든지 인정을 받고 주님의 은총을 받게 되어져 있습니다. 이러므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할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까 하루하루 생활을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면 천국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현재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라는 말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적으로 이뤄지기를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통치하시도록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지금 이루어져야 합니다.
왜 현대인들이 천국에 대한 소망을 잃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현재적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고 있기 때문에 장차 들어갈 천국의 행복을 맛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통치를 구하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구하면 우리에게 세상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음으로 미리 천국에서 경험할 것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타락함으로서 사단의 통치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사단의 통치 아래 있는 인생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 역사를 시작 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막1:15) 누구든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면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힘써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두가지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히 여김을 받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지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삶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테복음에서는 주님은 이렇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 6:10)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하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집니다. 성경은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이렇게 하나님을 위한 기도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히 여김을 받게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위에 이루어지게 되는 복된 삶을 살게 됩니다.
벤자민 목사님은 사모님과 함께 전도를 나갔습니다. 전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셨을때에 집은 불이나서 화재로 두 아들은 숯덩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얼마든지 낙심 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은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결국 우리에게 유익하다는 사실을 믿었기에 그는 낙심하지 않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찬송이 되었습니다. 찬송가 249장입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주님은 우리자신을 위해 기도할 때에 어떤 내용으로 기도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눅 11:3)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눅 11:4)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첫째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여기에서 말씀하신 일용할 양식은 비단 음식만을 말씀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집도 필요하고 옷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음식은 우리의 생존에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일용할 양식을 기도하라는 말씀은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무위도식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땅에 들어가 소출을 거두었을 때 만나가 그쳤습니다. 우리는 생존은 하나님을 의지하되 우리 힘으로 가능한 일들을 꾸준히 감당하여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눅 11:4)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일용할 양식이 육신의 건강을 위한 기도라면 죄사함은 영혼을 위한 기도요, 영혼의 건강을 위한 기도이겠습니다. 일용할 양식이 미래를 위하여 드리는 기도라면 죄사함은 과거를 뒤돌아보며 회개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기도이겠습니다.
죄는 우리 영혼을 병들게 하는 암과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어길 때,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단절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성도 파괴됩니다. 자신은 죄의 종이 됩니다.(요8:34)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예수님을 영접하므로 모두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몸과 마음으로 죄를 짓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에 음욕을 품는 자마다 간음한 자라고 했습니다.(마5:28)
사실 마음으로 짓는 죄가 몸으로 짓는 죄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하더라도 타락한 본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막7:21,22)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우리 죄를 자백하고 죄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께 하십니다.”(요1:9)
그런데 주님은 우리의 용서를 구하기 전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자를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막11: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형제를 판단하고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나아가 용서를 빌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살피고 형제를 무조건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입니다.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은 우리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일곱 번 뿐만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무한정으로 형제를 용서해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형제의 죄를 용서해야 할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셋째는 시험에 들지않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영육간의 건강을 위해서는 육신의 필요를 위해서 기도해야하고 남의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하고 또한 자신의 죄 용서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다시는 죄에 빠지지 않기 우해서는 사탄의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한 세번째 기도에 시험에 들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욕심이 있습니다.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그런데 이 욕심을 충동질해서 죄를 짓게 만드는 존재가 사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의 시험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꾀어 죄에 빠지게 한 사단은 지금도 우리를 유혹하므로 때로는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럽기도 하고, 지혜 줄만 하고 어떻게 좋아 보이고 좋은지... 그래서 결국 넘어가므로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으므로 기도하되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라고 기도하라 했습니다.
인간은 지혜로운 것 같지만 마귀의 시험에는 아주 약합니다. 그래서 언제 시험에 들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연약함을 깨닫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이는 범죄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기도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주관적인 욕심에 끌리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또, 시험에 끌리기 시작한 사람은 시험에 빠져나갈 길을 열어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할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피할 길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고전10:13)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했습니다.(22:40)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았습니다.(22:33) 결국 그는 큰 시험에 들어 그날 밤에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부인을 하고 심히 통곡을 했습니다.(22:11) 베드로는 후에 기도하지 않았던 죄악을 깊이 회개하고 기도의 삶이 되었습니다.(행3:1, 10:9) 그리고 그는 그의 서신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5:8,9)했습니다.
저는 교우님들을 위하여 이 세가지를 한가지로 줄여서 기도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즉 속사람이 강건해 지기를 기도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건강하게 되면 몸도 건강해지고 시험도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되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오랜 기도의 습관이 있습니다. 한가지는 충전입니다. 기도할 때에 내 영이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도록 힘쓰는 것입니다. 자동차가 아무리 좋아도 개스가 없으면 사용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아니하면 우리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받기 위해서 힘씁니다.
두 번째는 조율입니다, 악기가 절대음감에 따라 조율되지 아니하면 악기로 사용될 수 없는 것처럼 저의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에 맞출려고 애씁니다. 주여 다음주일 설교할 말씀을 주시옵소서 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서 많이 기도드립니다.
우상숭배자들은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우상을 찾습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하여 하나님을 찾습니다.
오늘은 새해 첫주일입니다. 우리 모든 교우님들은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늘 추구하시고 또한 영육간에 강건하셔서 올 한해동안 구하시는 기도마다 응답받으셔서 주님은 은총 가우데 살아가시는 한해가되시기를 바라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