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란 곧 교정이다.

 

(13:1-9)

 

(1)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2)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3)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첫째로 회개란 무었입니까?

 

회개(悔改)란 말은 뉘우칠 회()와 고칠 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회개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그것을 주님앞에 자백하고 그리고 나아가 그 잘못된 삶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회개의 열매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회개란 단순히 마음으로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의 변화가 동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회개를 교정이란 단어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회개란 표현보다는 교정이란 표현이 쉽게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가시다보면 잘못된 것을 교정할 때가 있습니다.

치아교정이라든지 영어발음교정, 허리척추교정, 체험교정, 주보원고교정, 나아가 성품교정, 습관교정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교정 등등이 있습니다.

우리중 누구도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 말은 우리 모두는 교정이 필요한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반드시 우리의 삶에 잘못된 부분들을 교정해서 바로 잡아야 할 것입니다. 교정해야 할 것을 그냥 두고살아가면 사소한 것은 큰 문제는 아니지만 어떤 부분은 우리로 하여금 큰 불행을 겪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회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교정의 필요성을 말씀드리자면 우선 198391일 대한항공 007편은 미국 뉴욕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을 출발, 앵커리지를 경유해서 김포국제공항으로 가던중 소련 영공에서 소련 공군전투기의 공격을 받아 사할린 서쪽에 추락하여 탑승자 전원이 사망한 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사고기는 이륙 당시에 이미 세 대의 관성 항법장치 중 한 대에 이상이 있는 상태였읍니다. 그럼에도 출발하였고 결국에는 KAL 007편이 항로를 몇 시간이나 이탈했음에도 기장, 부기장, 기관사 모두 눈치채지 못했고 결국에는 269명이란 귀한 생명을 잃는 사건이 생겼던 것입니다.

 

어쨌던 군용기가 민강항공기를 격추한 사건으로 국제 사회의 비난 여론이 계속되자 소련은 사건 발생 5일 만에 적기가 출현한 것으로 오인했다고 변명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GPS를 민간 부분에 개방할 것을 공표하였읍니다.

 

우리의 삶에도 우리가 걸어가야할 바른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사람들은 그 바른 길을 벗어나 잘못된 길을 걸어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할 일은 우리가 어디서 이탈했는지를 파악하고 바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교정의 중요성에 대한 실예가 되는 말씀입니다.

 

2000년 전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특히 예루살렘은 물 부족으로 인한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총독 빌라도는 유대인들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물을 대기 위해 실로암 이라고 하는 연못을 재정비해 더 깊이 파고 또 망대를 쌓아 그곳으로 물을 끌어들이려는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그것은 옳은 선택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어마어마한 공사에 들어가는 예산이었습니다. 빌라도는 그 공사비용을 성전의 돈으로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사람들과 마찰이 빚어지게 됩니다. 그 예산문제로 인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빌라도 뿐 아니라 자신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한 실로암 공사에 대해서까지도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실로암 공사도중 쌓았던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더욱 화가 난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의 돈을 빼앗아 하는 이 공사는 분명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성격이 급하기로 유명한 갈릴리사람을 중심으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빌라도를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모의합니다. 그 정보를 입수한 빌라도는 그 시위를 막기 위해 군인들을 변장시켜 성전으로 들여보내 그 갈릴리 사람들을 죽이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 사람들의 피를 성전의 희생제물로 쓰이는 동물들의 피와 섞는 아주 잔인하고도 끔찍한 일을 벌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의 전모를 두어사람이 와서 예수님께 보고를 드렸습니다.

 

우리가 이 본문을 잃을때는 보고를 받으신 주님께서 빌라도의 잔인함을 책망하시는 반응을 기대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뜻밖이었습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2-3)

이 말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유대인들이 와서 예수님께 빌라도의 잔인함을 보고 드릴 때 그 유대인들의 마음속에는 빌라도의 잔인함보다는 그러한 빌라도에게 잔인하게 죽임당한 갈릴리 사람들이 아마도 죄가 많아서 그러한 죽임을 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불행한 사고, 갑작스러운 재난이나 비참한 죽음은 심각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갈릴리 사람들과 같이 끔찍하게 죽임을 당한 일은 당연히 그들의 큰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비슷한 일을 할 때가 있습니다. 교인들이 재난이나 사고를 당하게 되면 겉으로는 위로하지만 속으로는 그들이 당하는 고통은 죄의 결과로 받는 심판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고를 당하거나,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다고 해서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당하는 사건이나 사고마다 그것이 그들의 범한 죄가 많아서 사고를 당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다 죄인인데 그렇다면 이 세상에 살아남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죽임당한 갈릴리 사람들이라고 해서 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주님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꾸짖으면서 당신들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망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3)

이 경고성 예언대로 유대인들은 결국 회개하지 않았고 그 결과 주후 70년에 이스라엘은 로마에 의해 나라가 망하여 2000년동안 나라잃고 세계를 헤매는 불행한 민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따지며 다른 사람의 잘못에 분노하는 동안, 나의 잘못을 점검하며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는 겁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탓하기 전에 내 안을 들어다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자인지, 내가 얼마나 자격 없는 자인지, 정말 어찌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무슨 말입니까? 사람마다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 회개하지 않으면 모든 사람이 다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오래도록 살다가 가고 어떤 사람은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시간 차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회개 하지 않으면, 돌이키지 않으면, 멸망을 만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부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4:17) 라고 외치셨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내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5:32)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범죄하고 회개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 (5:15)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하나님은 하나님이 계신 곳에 머물러 계시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편에서 함께 계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지만 죄와 함께 거하실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치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호세아 515절을 다시 살펴보면, 회개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다시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기쁨으로 받겠다는 뜻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거절감을 느낍니다.

삶에서 자신감이 언제 생깁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들여주신다는 믿음을 가질 때, 우리에게 자신감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인정해주실 때 당당해집니다. 모든 사람이 나를 배척해도, 나에게 등을 돌려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등을 돌리시지 않으시면 겁날 것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주시지 않으실 거야. 나를 쫓아내실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배척당한 듯한 느낌이 찾아옵니다. 죄를 짓고 난 후,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등을 돌리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거절은 무서운 것입니다. 이것만큼 두려운 것은 없습니다.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이 여기에서 옵니다. 인간이 느끼는 존재론적인 불안은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당한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왕따는 무서운 것입니다. 소외당하면 어디에서든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회에서 소외당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칩니다.

사람 사이에서 소외당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당한 것은 가장 큰 소외입니다. 이것은 비극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나면, 갈 곳이 없습니다.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벼랑 끝에 서게 됩니다.

아무리 성공했다 해도 하나님께서 외면하시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납니다.

 

회개않으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니까 두려움을 느낍니다.

다윗이 죄를 짓고 나니 그에게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해주시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거리가 생기면,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느끼는 두려움과 불안, 공포와 염려, 심리적 압박 등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이것은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사라졌기 때문에 두려움이 임함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흔들리면 돈을 쌓아놓아도 불안합니다.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도 두렵습니다.

 

회개않으면 기도가 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들여주신다는 것을 느끼면 행복합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거절해도, 하나님께서 나를 안아주시고 받아주시고 인정해주시고 품어주신다는 것을 느끼면 행복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주시고 인정해주시고 거절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느낄 때, 기도하는 것이 행복합니다. 그런데 회개하지 않으면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눈을 감고 기도하려고 하지만 막막합니다. 마치 절벽 앞에 선 것 같습니다. 소리를 지르지만, 허공을 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밀어내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받아주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영적 답답함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성령이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선지자, 제사장 왕을 임명하실 때에 그에게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기름 부으심은 성령의 임재하심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기름을 부을 때, 주의 영이 강하게 임하시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이 하나님께 거듭하여 불순종했을 때, 하나님께서 성령을 거두어가셨습니다. 사무엘상 1614절에 보면,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성령께서 사울에게서 떠나신 것으로 끝나지 않고, 악령이 사울에게 임하여 사울을 번뇌하게 했습니다. 그 후, 사울의 인생은 급격히 추락했습니다.

성령께서 사울에게서 떠나심으로 사울은 왕으로서의 역할은 끝났습니다. 결국 사울은 짐승처럼 살다가 비극적으로 죽었습니다.

 

우리가 왕인가, 성공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입니다. 성령의 임재가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성령께서 떠나시면, 온갖 재주를 다 부려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성령께서 떠나실 때,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은 추락합니다.

성령께서 떠나신 후에는 자기 힘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에너지가 금방 소진됩니다. 오래 버틸 수 없습니다. 직함, 직분은 있는데, 능력이 없다면, 그것은 비참합니다. 하늘의 음성이 끊어졌습니다.

성령께서 떠나셨다는 것은 그와 함께하셨던 하나님께서 손을 거두어버리신 것입니다.

물론 신약시대에는 성령께서 오시면 떠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경험한 사람에게서 성령은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죄를 지으면, 성령께서 근심하십니다. 성령이 소멸되십니다. 성령께서 근심하시면, 성령 충만한 상태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성령이 소멸된다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지만, 성령이 계시지 않는 것과 같은 상태의 삶을 산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시지 않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은 거룩의 영이십니다. 죄를 지은 인간과 동역하실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계시지만, 성령께서 계시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힘을 잃습니다. 시험에 빠집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능력이 사라진 삼손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망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망하지 않도록 주님께서 하신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대신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이사야 5214절은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라고 선언합니다. 예수님은 재판과 고문과 십자가 형을 받으시면서 가장 심하게 고난 당하셨습니다(27).

 

이사야는 예수님의 고난을 분명한 언어로 예언합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53:3, 5).

시편 2214-18절은 메시아의 고난을 예언하는 또 다른 강력한 구절입니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예수님의 육체적인 고난이 끔찍하였지만 그분이 겪으신 영적 고난에 비교하면 육체의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521절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의 무거운 죄악을 홀로 다 지셨습니다(요일 2:2).

 

예수님은 왜 그렇게 심한 고난을 받아야 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육체적인 고통이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생각은 어느 정도까지는 맞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당하신 육신의 고통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를 향한 인류의 증오와 잔인함을 더 많이 말해줍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사탄의 절대적인 증오는 끊임없는 고문과 학대 뒤에 분명히 숨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겪은 고난은 죄악에 물든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느끼는 증오와 분노의 궁극적인 본보기인 것입니다(3:10-18).

 

예수님은 그 죄 짐으로 인하여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27:46)라고 절규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육체적인 고난은 혹독하였지만 그 고난은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고 그 죄 값을 치르신 고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5:8).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로부터 철저히 버림받으셨습니다. 이것은 고통의 최절정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심판 받으셨습니다. 죄인인 우리가 고통당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대신 고통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버림받으심으로 그 결과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죄를 지어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고 나아가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이 과거에 어떤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졌다 할지라도 예수님만 의지하고 믿으면, 하나님께서 받아주십니다. 안아주십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난 백성입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으신 십자가 사건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 이상 외면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받아주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 먼 도시로 갔던 아들은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을 배척하지 않았습니다. 탕자가 마을 어귀에 나타났을 때,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발견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한 번도 배척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절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쫓아내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희생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의 모든 과거를 덮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 임마누엘입니다. 그 능력의 이름을 붙잡고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쫓아내시지 않으십니다.

 

셋째로 망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희생적으로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열어 놓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통하여 하나님과 바른관계를 갖게되고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은총과 복을 받아 누리는 우리의 할 일입니다.

주님은 그 사실을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한 포도원의 주인이 무화과나무를 심었는데 3년 동안 기다리며 열매를 구했는데 열매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포도원지기에게 열매 없는 이 나무를 찍어버리라고 합니다. 열매 없는 나무 때문에 땅을 낭비하는 것보다 그 땅에 다른 나무를 심어서 열매를 거두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그러자 포도원지기가 주인을 설득합니다. 자기가 거름을 주며 나무를 잘 관리할 터이니, 올 한 해만 더 시간을 달라는 것입니다.

이 비유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열매를 기대하신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의 열매는 성경 전체에서 다양하게 언급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요약하면 열매는 교정과 변화입니다.

삶의 변화, 인격의 변화, 가치관의 변화, 생각의 변화, 전과는 다른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에게 기대되는 것은 그에 따르는 변화입니다.

구원 받은 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 사람들과 다른 목표를 가지고,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지고, 다르게 살아갑니다.

당신은 어떤 나무입니까? 나무는 열매를 통해서 알 수 있다고 하셨는데 여러분들은 어떤 열매를 맺고 계십니까?

예수님을 믿은 후 나의 삶이, 내가 돈을 쓰는 목적이, 나의 가치관이, 내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이, 내 생각이, 나의 말과 행동이 점점 바뀌고 있습니까?

 

이 교정과 변화가 가능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방법은 주님께 붙어 있는 것입니다.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자연적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가지된 우리가 나무되신 예수님께 붙어 있기만 하면 됩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 놓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힌죄가 있으면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서 통로가 막히지 않도록 함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붙어있는 노력을 성경은 기도와 말씀묵상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기도시간이 길수록 하나님과 더불어 있는 시간이 길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가 깊어집니다. 예수님께 붙어 있다는 것은 곧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깨우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깨어있는 성도가 많으면, 자연히 같이 깨어있게 됩니다. 정신이 번쩍 들도록 같이 기도해야 합니다. 부부 가운데 한 명이 깨어있으면, 그 가정은 삽니다. 목장에서 한 명이 깨어있으면, 그 목장은 살아납니다. 그러나 다 자면 죽습니다. 마귀의 역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마귀는 교회를 잠들게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잠들게 합니다. 잠들면 마귀의 수중에 들어갑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깨어있지 못하게 공작합니다. 잠들어서 기도하지 못하게 합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깨어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살려달라고 기도하세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가로막고 있는 죄가 무엇인지 보여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원망하는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미워하는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부도덕한 삶일 수도 있습니다. 어둠의 영역들, 주님보다 사랑하는 것들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면, 그것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성령을 환영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적극적으로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뜻을 가르쳐 주시기 때문에 말씀을 규칙적으로 읽는 습관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강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으로 우리를 유익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하나님이 하라 하시는 것 같으면 즉시 순종해야 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축복하시기를 원하시는데 우리가 그 축복된 말씀을 들을려고 하지를 않는데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넓은 사막을 정처없이 방황하며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지고 있는 물이 다 떨어져가고 있는 것을 알고 걱정과 불안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빨리 오아시스를 찾아야 합니다. 그러다가 사람의 발자국을 발견하고는 이젠 살았다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발자국만 따라가면 분명 오아시스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계속 따라갔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따라가도 발자국은 끝이 없고, 해는 점점 기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야 그는 자기 발자국을 자기가 되밟아가면서 맴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윽고 저녁 노을과 함께 북극성이 반짝였습니다. 별을 보고 그는 제대로 방향을 찾아서 바른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언제까지 똑같은 길을, 내가 내 발자국을 쫓아가며 거기에 길이 있는 것처럼 한평생을 살아가야 합니까? 이제는 생각을 바꾸어서 하늘을 쳐다보아야 합니다. 하늘을 쳐다보는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야 비로소 내 생의 궤도가 바른 길에 서게 될 것입니다.

 

금주간은 고난주간입니다. 한주간동안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우리의 삶 가운데서 교정해야 할 부분들을 살펴보시고 교정하시므로서 결코 망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누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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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2019.4.21. 듣는자는 살아나리라 맨하탄한인교회 2019.04.24 80
» 2019.4.14. 회개는 곧 교정입니다. 맨하탄한인교회 2019.04.18 114
13 2019.4.7. 좋은 사역자 기드온 맨하탄한인교회 2019.04.10 29
12 2019.3.31. 불을 던지러 오신 예수님 맨하탄한인교회 2019.04.03 100
11 2019.3.24.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 맨하탄한인교회 2019.03.25 100
10 2019.3.17. 까마귀를 생각하라 맨하탄한인교회 2019.03.20 153
9 219. 3. 10.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 맨하탄한인교회 2019.03.13 174
8 2019.2.24.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맨하탄한인교회 2019.02.25 526
7 2019.2.17. 본질과 비 본질 맨하탄한인교회 2019.02.21 222
6 2019.2.10. 네 속에 있는 빛 맨하탄한인교회 2019.02.14 86
5 2019.2.3. 복이 있는 자 맨하탄한인교회 2019.02.14 103
4 2019.1.27. 주인없는 집 맨하탄한인교회 2019.02.14 261
3 2019.1.20. 그 간청함을 인하여 맨하탄한인교회 2019.02.14 213
2 2019.1.13. 말씀의 힘 맨하탄한인교회 2019.02.14 75
1 2019.1.6. 예수님께 기도를 배우는 자들 맨하탄한인교회 2019.02.14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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